영덕의 민간신앙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327
한자 盈德-民間信仰-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언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지역의 마을신앙, 가신신앙, 무속 등 민간신앙과 관련된 이야기.

[개설]

민간신앙(民間信仰)은 민간에서 전승되어 온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신앙 행위로서 뚜렷한 교조가 없고, 체계화된 교리도 없으며, 교회도 구성하지 못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발생적 신앙인 민간신앙은 오랜 역사를 통해 민간의 생활에 존속해 온 기층 종교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해당 지역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민간신앙은 일반적으로 마을 전체 성원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마을신앙과 개별 가정에서 행하는 가신신앙(家神信仰) 그리고 무속(巫俗)으로 크게 분류해 볼 수 있다.

바다와 산지의 다양한 생태학적 배경과 해안 지역에서는 드문 반촌(班村)이 밀집된 사회 문화적 특성을 배경으로 하는 영덕 지역에서는 지역 특유의 자연 및 인문 환경이 반영된 다양한 형태의 민간신앙이 전승되고 있다. 특히, 높은 위험성을 수반한 거친 해양 환경을 삶의 터전으로 해 온 어촌 지역에서는 민간신앙의 전승 양상이 여타의 지역에 비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반촌지역의 마을신앙]

동해안 지역에 드물게 반촌이 형성된 지역 가운데 한 곳인 영해 지역의 반촌에서는 전통적인 사회관계에 기초하여 지역을 대표하는 사족(士族)들에 의한 동제(洞祭)가 전승되어 왔다. 원래 영해 지역에는 토성(土姓)으로 수안김씨(遂安金氏), 함창김씨(咸昌金氏), 영해박씨(寧海朴氏), 한산이씨(韓山李氏), 평산신씨(平山申氏)[황해신씨(寧海申氏)], 평해황씨(平海黃氏), 임씨(任氏)가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토성들의 세가 크게 약화되고 외래 성씨인 안동권씨(安東權氏), 영양남씨(英陽南氏), 무안박씨(務安朴氏), 대흥백씨(大興白氏), 재령이씨(載寧李氏)가 이 지역의 5대 성씨로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학통을 이어받은 많은 유학자들이 학문에 진력하여 다수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함으로써 영해 지역은 문향(文鄕)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영해 지역의 반촌 가운데 조선 후기 지역을 대표하는 하나 혹은 다수의 문중이 거주하는 마을에서 전승되는 동제는 전통적인 사회 관계 및 문중 사이의 관계를 반영한 동제로 전승되고 있으며, 그 특성은 다음과 같다.

우선 동해안 지역 반촌의 동제는 최근까지 촌락의 주요 문중 집단 중심으로 제의(祭儀)가 이루어져 왔다. 이에 반하여 주요 문중 성원이 아닌 타성들은 동제의 운행과 관련하여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이를 통해 반촌에서 지내는 동제가 마을의 사회적 관계를 확인하고 지속하는 데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요 세 문중의 성원이 마을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동제의 변화가 가장 적게 나타난 원구마을에서 이러한 현상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다.

영해 지역 반촌의 동신(洞神)은 주로 마을의 입구에서 액을 막는 수구막이 혹은 골맥이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골맥이 동신은 주요 반촌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특히 괴시리의 큰 동신과 인량리의 팔풍정제당의 유래담을 통해 골맥이동신의 성격을 잘 살펴볼 수 있다. 이는 부정(不淨)한 것은 외부에서부터 들어온다는 인식이 영해 지역에서 강하게 작용하여 영해 지역의 촌락에는 수구(守口)의 개념이 강화된 민간신앙의 형태가 많은 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동제(洞祭)를 지내는 방식은 유교식 제의(祭儀)를 따르고 있다. 괴시리의 큰 동신제에서 거리신에 대한 간단한 제의를 병행하는 것을 제외하면, 동제를 지내는 절차는 영해 지역 반가에서 행하는 기제사, 묘제,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의 절차와 거의 동일하였다.

유교의 전통이 강한 지역적 특성이 반영되어, 경상북도 지역의 동제에서 흔히 나타나는 천왕굿, 마을굿과 같은 무속적 요소는 찾아볼 수 없다. 인량리 팔풍정제당의 유래담에서 유교의 도입에 큰 역할을 한 역동(易東) 우탁(禹倬)[1263~1342] 선생이 학식으로 무속적인 속성을 가지는 팔령신을 제압하는 것에서도 이런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근대화, 도시화의 영향과 새로운 가치관의 도입 등으로 동제가 간소화되거나 사라지는 한국사회 전반적인 양상은 영해 지역에서도 나타난다. 영해 지역에서 동제의 간소화는 제관(祭官) 선정 방식의 변경, 금기(禁忌) 수행의 완화 및 마을 내 제당(祭堂)의 통합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관 선정에 따른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하여 순번제로 제관을 정하거나 아예 이장이 담당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으며, 금기 수행도 크게 완화되었다. 원구리를 제외한 두 곳에서는 둘 이상의 제당이 하나로 통합되어 운행되고 있다. 그러나 동제의 간소화 경향에도 불구하고 영해 지역 반촌의 동제는 향후에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영해 지역 반촌의 동제는 지역민 전체의 염원을 기원하는 종교적 의미 이외에도 동제를 통해 마을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를 확인하는 의미를 지녀왔다. 후자적 의미는 특히 원구리괴시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비록 괴시리에서 큰 동신제에 타성의 제관을 최근에 허용하고 있으나, 이는 종족 집단 중심의 동제 운행이 어려운 상황에서 타성을 통해서라도 동제를 이어가려는 방편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촌지역의 마을신앙]

일반적으로 어촌에서는 민간신앙이 크게 성행하였으며, 그 전통은 다른 지역에 비해 현재까지도 잘 전승되고 있다. 경상북도에서 산간 내륙에 위치한 지역을 제외하면 동제와 같은 민간신앙은 크게 간소화되거나 폐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대규모 공업단지가 들어서거나 대도시에 인접한 지역에서 이러한 양상은 두드러진다. 그러나 영덕 지역의 어촌에서는 이러한 실정과는 달리 여전히 모든 촌락에서 동제를 지내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문화에 대한 주민의 강한 의식을 살펴볼 수 있다.

마을신앙의 하나로서 풍어제의 성격을 지니는 별신굿도 예전에 비해 크게 간소화되었으나 어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거나 활성화된 곳에서는 전승되고 있다. 마을신앙을 지내는 제당(祭堂)의 구성은 마을마다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당집으로만 구성된 제당, 당집과 당목(堂木)으로 구성된 제당, 당목 혹은 자연석으로 구성된 제당 등 형태가 다양하다. 대체로 한 곳의 제당에서 동제를 지내는 마을이 다수를 이루고 있으나, 여러 곳의 제당에서 동제를 행하는 마을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영해면 대진리에 있는 세 곳의 어촌에서는 둘 이상의 제당에서 동제를 지내고 있다. 대진1리대진2리의 장군당, 오풍우어른당과 같은 특이한 제당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과거 영해 지역에 역질이 돌때 이를 막기 위하여 장승[대진2리 장군당]을 세우거나, 오풍우라는 인물이 환자를 돌보아 준 것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이처럼 액막이를 위한 장승, 역질을 돌본 인물을 동신(洞神)으로 모시는 것은 대부분 촌락의 동신이 ‘○씨 터전에 △씨 골맥이’로 나타나는 것과 함께 영덕 지역 어촌 동신의 액막이를 위한 수호신적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동신을 ‘○씨 터전에 △씨 골맥이’로 표현하는 것은 마을을 개척한 인물을 동신(洞神)으로 모시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간주된다. 즉, ○씨가 마을에 처음으로 입향하여 터를 잡고, △씨가 나중에 정착하여 같이 마을을 번성하게 한 조상신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마을을 개척한 조상들은 죽어서 고을막이[골맥이]가 되어 액을 막는 수호신이 된다. 실제로 특정 성씨의 후손들이 현재까지 마을에 거주하는 사례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마을 개척신 위주의 어촌 동신 신격(神格)의 이러한 특성은 동신의 위패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동신을 토지신, 성황신, 동신, 당산지신 등 일반적인 신격으로 나타내는 촌락도 있으나, 위패를 모신 대부분의 촌락에서 특정 성씨를 새겨 두고 있다. 동신의 신격에 나타나는 특정 성씨와 그 마을에 거주하는 지역민과의 관계는 동신과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의 성씨와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영덕 지역 어촌의 마을신앙은 종교적 특성 외에 지역사회의 정치사회적 특성, 즉 마을신앙의 복합적인 의미도 반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동제를 주관하는 집단의 위상에 관한 것이다. 이는 영덕 지역 어촌 여러 마을에서 확인한 것처럼 마을에 입촌한 순서에 따라 신격이 정해지고, 나중에 입촌한 집단은 많은 정성을 들인 다음에야 동신을 모시게 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또한 주민들은 터를 닦은 토지신이 골맥이 동신보다 우선한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다음으로 생업 활동에 따른 동제의 분화와 지역민의 서열화이다. 근래 어로 활동이 농사보다 많은 소득을 올리기 이전까지 어업은 농업에 비하여 경시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농민과 어민이 공존하였던 일부 어촌에 거주하는 주민의 의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뱃불과 같은 어촌에서 150여 년 전에 어민이 무사한 어로 활동을 기원하기 위해서 동제당(洞祭堂)에 드나드는 것을 농민들이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제당이 분리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촌락에 거주하는 주민 중에서 생업 활동에 따른 사회적 서열이 존재하였음을 이해할 수 있다.

원래 하나의 촌락에서 주민의 생업 활동에 따라 제당이 분화되는 사례는 병곡1리와 2리 등 여러 어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을신앙의 한 형태로 어촌 지역의 별신굿도 여전히 전승되고 있다. 비록 예전에 비해 제의를 수행하는 간격이 늘어나고 제의 절차나 제의 준비 등이 크게 간소화되고 있으나, 어업에 대한 의존도가 여전히 높은 어촌에서는 많은 비용과 노력이 수반되는 별신굿을 전승하고 있다.

[가신신앙]

주부들이 가내의 평안과 부귀를 기원하는 신앙 행위인 가신신앙의 신격으로는 조령 혹은 조상, 성주, 삼신, 조왕, 터주, 측신, 업, 오방신 등이 있다. 영덕 지역에서도 전국적으로 발견되는 다양한 형태의 가신신앙이 전승되고 있는 한편,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신앙 행위도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어업에 종사하는 가정에서는 가신의 대표적인 성격을 지니는 성주에 대한 신앙 외에 선박의 진수나 매해 첫 조업 때 어선에서 행하는 제의의 신격으로 배성주를 모시고 있다. 어촌에서 발견되는 가신신앙으로 안전한 어로 활동과 풍어를 기원하는 뱃고사와 개개인의 액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며 바닷가에서 행하는 용왕먹이기가 있다.

영덕 지역의 가정에서 모시는 조상신의 신체(神體)는 조상당세기라고 하며, 다른 지역의 단지의 형태가 아니라 대나무 등의 재료로 제작한 사각형의 바구니이다. 이 바구니 안에는 망자의 성명, 생년월일, 기일 등을 적은 종이를 넣어 두며, 당세기 위에는 후손들의 혼례에 사용한 예단을 끊어 얹어 두었다. 해안에 접한 영덕군에서는 이월 영등맞이도 빠트릴 수 없는 가신신앙이며, 바다에 빠져 숨진 사람의 넋을 건져 해원(解冤)하는 넋건지기도 행하였다. 이 밖에도 영덕 지역에서는 조상신과 삼신에 대한 관념이 비교적 높게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의 민간신앙]

영덕 지역의 민간신앙의 전승은 도시와 농촌 지역에 비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만큼 바다라는 거친 환경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삶의 불확실성이 높았음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러 부분에서 민간신앙의 간소화를 확인할 수 있다. 공동체 신앙인 마을신앙의 경우 제당(祭堂)의 통폐합, 제의(祭儀) 수효의 축소, 제관(祭官) 수의 축소, 금기(禁忌) 수행의 간소화, 제수(祭需) 장만의 간소화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동제가 간소화되는 일반적인 양상과는 달리 제당의 구성은 정형화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신체의 형태가 나무나 바위와 같은 자연물보다는 신위(神位)를 안치한 당집의 형태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서 이해할 수 있다.

원래 자연물을 신체(神體)로 모시던 촌락에서 나중에 당집을 건축하는 사례가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당의 구성이 당집을 지어 신위를 모시는 형태로 변경되면서 제의 방식도 유교식으로 변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촌 지역에서 여전히 전승되는 별신굿도 과거에 비해 크게 간소화되었다. 무엇보다도 제의를 지내는 간격이 과거의 2~3년에서 10년 간격으로 늘어났으며, 굿을 행하는 기간도 과거 일주일 정도에서 요즘은 하루나 이틀 정도로 줄어들었다.

별신굿을 지내는 시기도 예전에는 주로 음력 시월에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요즘에는 삼짇날을 전후하여 지내고 있다. 음력 시월에는 어로 활동과 농사일 등으로 분주한 시기인 점을 고려하여 비교적 바쁘지 않은 봄철로 변경한 것이다. 별신굿을 과거에 비하여 간소화한 것은 어민의 수가 감소하고, 어자원의 고갈 등으로 어업이 침체되는 가운데 많은 비용을 충당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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