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밑거름, 장사상륙작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324
한자 仁川上陸作戰成功-長沙上陸作戰
영어공식명칭 The Underground of the Inchon Landing Operation, Jangsa landing oper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용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0년 9월 14일~19일 - 장사상륙작전 실시
현 소재지 장사상륙작전지 -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지도보기

[정의]

1950년 6.25전쟁 초기 인천상륙작전의 밑거름이 된 장사상륙작전과 학도병에 관한 이야기.

[개설]

장사상륙작전은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 초기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밀린 상황에서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날 전개되었다. 이 작전은 1950년 9월 14일부터 19일까지 6일 동안 북한군을 교란하고, 인천상륙작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포항 북쪽 약 25㎞ 지점에 있는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일대의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학생들을 모집하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한 달이 조금 지나자,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려났다. 당시 많은 피난민들이 대구로 몰려들고 있었다. 피난민들 중에는 학생들도 많았다. 육군본부 동원과장 이명흠 대위[이하 이 대위]는 직접 대구 시내로 나가 모병활동을 벌였다. 학생과 청년들이 많이 자원하였다. 8월 24일에 이 대위는 모병한 장정들을 데리고 대구역으로 가서 열차로 밀양으로 갔다. 그리고 밀양에서 모병된 청년들과 합류시켰다. 이렇게 모인 병력이 760명[학도병 677명, 나머지는 정규 장교 및 부사관]이었다.

[학도병으로 구성된 제1독립 유격대대를 만들다]

8월 27일 이 대위는 모인 병력을 3개 중대로 편성하였다. 이것이 제1독립 유격대대, 이른바 학도병 '명(明)부대'이다. 밀양에서 유격대대원들은 체력단련과 정신교육을 받았다. 아직 개인화기를 지급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8월 31일에 육군본부[부산]로 이동하였다. 육군본부에서 임시로 '육본직할 유격대원'이라는 증명서와 개인화기를 지급받았다. 하지만 정식 군번은 부여받지 못하였다. 그런 상태에서 유격대대원들은 유격전에 필요한 소화기 사용법, 교량 및 토치카 파괴 방법 등의 교육을 받았다.

[장사상륙작전 부대로 선정되다]

유엔군은 1950년 8월 말경에 인천상륙작전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작전 안에는 여러 기만작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하나로 동해안 지역의 기만작전에 새로 창설된 미군 레인저 중대를 투입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훈련이 미흡하여 투입이 취소되었다. 그 대안으로 유엔군사령부에서는 포항방어를 담당하고 있는 한국군 제3사단에서 1개 대대 병력을 차출하여 투입해 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제3사단 입장에서는 곤란하였다. 당시 9월 초에 사단이 맡고 있었던 포항 일대의 전선이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육군본부는 제1유격대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9월 10일에 유격대대장에게 작전명령 제174호를 하달하였다. 이른바 장사상륙작전의 명령서이다. 9월 14일에는 육군본부 연병장에서 정식 출정식이 열렸다.

[악천후와 총알세례 속에서 간신히 상륙하다]

유격대원들을 실은 문산호는 9월 14일 오후 4시에 부산항을 출발하였다. 그 뒤 문산호는 지원함인 미 해군 ‘엔디코트(Endicott)’함과 해상에서 합류하여 장사리 해안으로 이동하였다. 작전환경은 좋지 않았다. 이동 전날인 9월 13일에 태풍 ‘케지아(Kezia)’가 일본 규슈지방을 지나 동해상으로 지나갔기 때문이다. 또한, 문산호에는 통신장비가 부족하여 연락을 원활하게 할 수 없었다.

어쨌든 문산호는 9월 15일 5시 무렵에 장사리 해안 외곽 4㎞ 지점에 도달하였다. 해안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고 파도가 매우 높아 해안에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악천후로 기습상륙이 불가능하였다. 설상가상으로 상륙지점인 장사리 인근 고지에 북한군 방어부대가 문산호를 먼저 발견하였다. 그리고 집중포화를 쏟아 부었다. 정상적인 접안이 여의치 않자, 이 대위는 특공조 7명을 차출하였다. 그리고 특공조에게 해안으로 밧줄을 들고 헤엄쳐 가서 백사장의 소나무에 연결하라고 지시하였다. 특공조는 강풍과 파도 그리고 쏟아지는 총알 세례를 받고 전사하였다. 이어 다시 편성된 특공조가 4개의 밧줄을 잇는 데 성공하였다. 바로 이 대위는 2중대에게 약 30여 미터 떨어진 해안까지 밧줄을 붙잡고 상륙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는 동안 문산호는 북한군의 계속된 집중포화로 5시 30분 무렵에 기관 고장으로 표류하였다. 그러다가 6시 무렵에는 암초에 들이받혀 해안 부근에 좌초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엔디코트함이 함포로 계속 지원사격을 해 주었다. 지원사격에 힘입어 유격대원들은 해안으로 상륙할 수 있었다.

[지상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다]

제일 먼저 상륙을 끝낸 제1중대원들은 북한군의 해안 진지 3곳을 파괴하는 데 성공하였다. 다른 중대는 09시까지 상륙을 완료한 다음에 북한군의 잔적을 소탕하고, 교두보를 넓히고, 북한군의 역습에 대비하였다. 제2중대는 해안 200고지 우측으로 돌아 진출하여 이 일대에 구축된 북한군의 해안 방어진지를 무력화시켰다. 어느 정도 교두보를 확보하였다고 판단한 이 대위는 대대 전력을 정비하면서 200고지에 지휘소를 차렸다. 그 뒤 나머지 병력으로 전방의 271고지를 공격하여 교두보를 공고히 하였다.

하지만 초기 상륙과정에서 전사 60여 명, 부상 90여 명 등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때 전술고문으로 배속된 유일한 영관급 장교인 전성호 대령도 잃었다. 그리고 상륙하다가 많은 양의 탄약과 전투물자들을 바다에서 잃었다. 또한, 상륙 직후 북한군 진지를 파괴하는 데 앞장섰던 제1중대장 이영훈 중위도 전사하였다. 반면에 북한군 39명을 사살하였고, 3명을 생포하였다. 그리고 진지 9곳을 파괴하였고 북한군의 직사포 2문과 포탄 450상자, 지프 1대, 기관총 45정, 로켓포 1문, 따발총 5정 등을 노획하였다.

[역부족으로 철수를 결정하다]

북한군은 상륙부대 규모를 약 2개 연대로 보았다. 그래서 그 지역을 방어하는 제5사단의 예비대인 제12연대와 다른 위급한 전선에 투입되어 있는 1개 연대를 뽑아 장사리로 급히 보냈다. 여기에다 북한군이 자랑하는 T-34 전차 4대까지 보냈다. 상륙 2일 후인 9월 17일 06시에 북한군은 제3중대가 방어하고 있던 218고지 정면으로 반격해 왔다. 하지만 유격대원들이 완강히 저항하자, 제1중대가 방어하고 있던 125고지로 방향을 바꿔 공격하였다. 끝내 북한군은 목표를 점령하지 못하고 다시 퇴각하였다. 이런 상황을 분석해 본 이 대위는 공격해 온 북한군이 대규모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제1중대와 제3중대 병력을 후방의 200고지로 철수시키고 대대 지휘소를 좌초된 문산호로 옮겼다.

다음 날인 9월 18일 5시 무렵에 북한군은 다시 220고지 방향으로 공격해 왔다. 북한군의 병력은 계속 늘어났고 공격이 매우 위협적이었다. 반대로 유격대대는 탄약이 점점 떨어져 가고 있어 현 방어선을 고수하기가 곤란하였다. 결국 이 대위는 다음 날인 9월 19일 아침에 철수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미 해군 기동전단의 지원 포격을 받아 가면서 단계적으로 병력을 해안으로 퇴각시켰다. 이를 본 북한군은 해안 방향으로 점차 압박을 가하였다.

[상륙과 유사한 조건에서 미 해공군지원을 받아가면서 철수하다]

당시 유격대대의 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다. 인원과 장비의 손실이 매우 큰 데다가 대대를 수송해 줄 함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군이 전열을 정비하여 격렬하게 반격해 온다면 지탱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을 현장에서 지켜본 엔디코트 함장은 우선 동해안 일대에 포격지원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기동전단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기동전단장은 헬레나(Helena)함 등을 이끌고 장사리 인근 해역으로 내려왔다. 9월 17일에 기동전단장은 헬리콥터 편으로 이 대위를 직접 헬레나 함으로 불러들여 추가적으로 지원해야 할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이때 이 대위는 탄약과 식량이 부족하다고 호소하였다. 이에 기동전단장은 탄약지원과 식량지원 그리고 지속적인 함포지원을 약속하고 이 대위를 돌려보냈다. 9월 19일에 철수 순서가 정해졌다. 즉 '제1중대-제5중대-사령부-제3중대-제2중대' 순이었다. 문제는 철수함인 조치원호였다. 이 배는 정상적인 상륙함이 아니어서 해안 가까이에 접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 상륙 때와 마찬가지로 밧줄로 해안까지 연결한 뒤에 해안에 있는 병력들이 밧줄을 잡고 승선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배에 타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고, 또한 그만큼 북한군의 공격에 많이 노출될 것이므로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6시 30분 무렵부터 철수작전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유격대원들의 철수 조짐이 보이자, 북한군은 해안으로 화력을 집중하였다. 하지만 미군의 화력지원이 더 우세하였다. 상륙할 때는 공군 지원이 없었지만, 철수할 때는 3대의 항공기가 북한군 진지를 폭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동전단의 헬레나함에서 뿜어내는 지원화력은 위력적이었다. 이러한 화력지원에 힘입어 철수할 때 유격대원들의 피해는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해군장교 1명이 부상을 입었고, 유격대원 9명이 전사했으며, 12명이 부상당하였다.

한편, 철수를 마쳐야 할 시간은 12시까지였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배를 타지 못하고 해안에 약 60명 정도의 유격대원이 남아 있었다. 문제는 이들을 마저 태워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놔두고 출발해야 할 것인가였다. 이때 신속히 전장을 이탈하려는 조치원호 선장과 한 명이라도 더 철수시키려는 이 대위 간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어쨌든, 남은 병력의 절반 정도인 30여 명을 철수시키고 난 뒤인 오후 1시가 넘어서자, 바닷물이 서서히 나가는 썰물이 시작되었다. 이제 더 이상 지체하다가는 배마저 빠져나오지 못할 지경이었다. 그때까지 해안에 남아 있는 39명의 대원들은 먼저 철수하는 병력들을 엄호하면서 최후까지 북한군을 저지했던 제2중대 5소대원들이었다.

결국 조치원호는 39명을 태우지 못한 채, 해안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오후 1시 33분경이었다. 남겨진 유격대원들은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한편, 조치원호는 약 640여 명을 싣고 이튿날인 9월 20일 새벽에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장사리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렸지만 피해도 컸다]

유격대원들은 당시의 악천후, 탄약과 장비 부족, 예정보다 긴 작전 기간 등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270여 명을 사살하였고 4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방어진지 11개소, 교량 2개소, 도로 6개소를 파괴하였다. 이 외에도 장총 등 34정과 450개의 포탄상자 등을 노획하였다. 반면에 아군은 전사자 139명[상륙함 선원 및 장사리 잔류인원 39명 포함], 부상자 92명[상륙함 선원 17명 포함]이 발생하였고, 2700톤급 문산호 1척을 잃었다.

[장사상륙작전은 전략, 전술적으로 큰 기여를 하였다]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을 기습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 북한군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이 작전은 동부전선의 북한 제2군단 제5사단의 배후를 공격하여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후방을 교란시킴으로써 전체 아군작전에 기여하였다. 즉, 당시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보급로가 차단당할 위기에 직면하였다. 특히 '포항-경주' 축선의 형산강 방어선에서 적지 않은 병력을 빼내 후방인 장사리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장사상륙작전은 북한군의 후방인 장사리 일대를 교란하여 북한군의 대부대를 끌어오게 함으로써 형산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공세를 약화시키고 아울러 아군의 반격작전을 용이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였다. 전체적으로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에 발맞춰 한국군이 낙동강방어선 전 전선에서 쉽게 그 방어선을 돌파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해 주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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