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가문이 삶의 터전을 일군 마을: 창수면 인량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314
한자 一十二家門-: 蒼水面仁良里
영어공식명칭 The village where 12 clans first settled in Yeonghae area: Illyang-ri, Changsu-myeon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창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나라골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지도보기

[정의]

영해 지역에 세거하는 12가문이 거쳐간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나라골 이야기.

[개설]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나라골은 영해 지역에 세거하는 12가문의 입향지이거나 정착 초기에 거쳐간 마을이고, 그 중 8가문의 종가가 터를 잡은 반촌이다. 명망 있는 여러 성씨가 오랜 세월 갈등 없이 한 마을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나라골은 한두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는 반촌의 일반적인 특성에 비추어 매우 특이한 사례에 속하며,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전수하는 값진 학습장이 되고 있다.

[어진 선비의 마을 나라골]

영해면 소재지에서 경상북도 영양군으로 통하는 지방도 제918호선을 따라 약 2㎞ 가다가 원구마을 입구에서 우회전하여 북쪽으로 약 2㎞ 더 들어간 지점에 창수면 인량리가 있다. 등운산맥의 한 줄기인 인량대산을 배경으로 하여 산기슭에 동서로 길게 늘어서 있다. 인량대산의 끝자락이 마을의 동쪽과 서쪽을 감싸서 해풍과 서풍을 막아준다. 마을 앞을 흐르는 송천강 주변에 펼쳐진 넓고 비옥한 들은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된다.

이 마을은 뒷산의 지형이 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형국이라 하여 ‘나래골’이라 부르다가 음이 변하여 ‘나라골’이 되었다고 한다. 한자로는 익동(翼洞)·비개동(飛盖洞)이라 적는다. 일설에는 삼한시대 우시국(于尸國)이라는 부족국가의 도읍지여서 ‘나라골’이라 부르고 국동(國洞)이라 적었다는 설도 있다.

조선 초기에는 영해부 서면 지역으로 잉량화(仍良火)라 하였는데 조선 중기에 인량(仁良)으로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 어진 인물이 많이 배출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창수면에 편입하였다. 행정적으로는 마을 중앙의 조그만 개울을 경계로 하여 동쪽의 인량1리[아랫나라골]와 서쪽의 인량2리[웃나라골]로 구분한다.

[열두 성씨가 거쳐간 마을]

인량리는 옛 영해 지역에 터를 잡아 살고 있는 12가문이 거쳐간 마을로 유명하다. 영해 5대 성씨로 불리는 대흥백씨(大興白氏)·영양남씨(英陽南氏)·안동권씨(安東權氏)·재령이씨(載寧李氏)·무안박씨(務安朴氏)를 비롯하여 야성정씨(野城鄭氏)·선산김씨(善山金氏)·신안주씨(新安朱氏) 등이 이 마을을 거쳐서 영해에 입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흥백씨로서 영해에 처음 입향한 이는 고려 말 승평부사(昇平府使)를 지낸 백견(白堅)과 백견의 장남 백문보(白文寶)[1303~1374]이다. 백견영해박씨인 시중평장사(侍中平章事) 박감(朴瑊)의 사위가 되어 병곡면 각리에 정착하였다가 수재로 창수면 인량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영양남씨 영해 입향조는 세종조에 감찰어사(監察御使)·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낸 남수(南須)[1395~1477]이다. 남수는 울진에서 태어났으나 인량에 거주하고 있던 대흥백씨 백린(白璘)의 딸과 혼인하여 인량에 정착하였다.

안동권씨 영해 입향조는 권책(權策)인데 단종의 외숙인 종숙부 권자신(權自愼)과 아버지 권자홍(權自弘), 큰형 권저(權箸), 둘째 형 권서(權署) 등이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일족이 모두 화를 당할 때 어린 나이로 홀로 영해에 편배(編配)되어 인량에 정착했다고 한다.

재령이씨 영해 입향조는 울진현령(蔚珍縣令)을 지낸 이애(李璦)[1480~1561]이다. 이애는 성종 때 둘째 아버지인 이중현(李仲賢)이 영해부사로 부임할 때 책방으로 따라왔다가 당시 영해 대성인 진성백씨 백원정(白元貞)의 딸과 혼인하여 인량에 정착하게 되었다.

무안박씨 영해 입향조는 증 사복시 정(贈司僕寺正) 박지몽(朴之蒙)[1445~?]이다. 박지몽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백부 박이(朴頤)가 영덕현령으로 부임할 때 따라와서 이 지역 토성인 야성박씨(野城朴氏) 박종문(朴宗文)의 딸과 혼인하여 인량리에 정착하였다.

함양박씨(咸陽朴氏) 영해 입향조는 부사직(副司直) 박종산(朴從山)인데 성주에서 인량으로 이거하여 영해박씨 박성간(朴成侃)의 딸과 혼인하였다.

야성박씨 인량 입향조는 도사(都事) 박종문(朴宗文)이다. 당시 영해 지역의 호족인 영해박씨의 막강한 세도를 조정에서 염려하여 이를 처리하라는 특임을 받고 영해 지역에 파견되어 영해박씨 실세들을 살상하지 아니하고 울령 밖으로 옮겨 살게 한 후 인량에 정착하였다고 전한다.

평산신씨의 인량 입향조는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빈시 판례 태복정(禮賓寺判禮太僕正)을 역임한 신득청(申得淸)이다. 공민왕에게 올린 시정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인량리로 이거하였다가 고려가 망하자 대진 앞바다에 투신 자결하였다고 한다. 신득청의 후손들은 일찍이 인량을 떠나고 현재 인량리에 거주하고 있는 평산신씨신득청과 계보를 달리하는 신만걸(申萬傑)의 후손들인데 임진왜란 때 용궁에서 영해부 입천동으로 옮겨와 살다가 신만걸의 손자 신준립(申俊立)이 인량에 정착했다고 한다.

야성정씨의 영해 입향조는 진사 정진(鄭溍)인데 무안박씨 박붕(朴鵬)의 딸[박지몽 증손녀]과 혼인하여 평해에서 인량으로 이거하였다. 정진의 사촌 정담(鄭湛)함양박씨 입향조 박종산의 증손녀와 혼인하여 인량에 정착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김제군수로서 곰재[熊峙]에서 전사하여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영천이씨 영해 입향조는 이사민(李士敏)이다. 할아버지가 영해부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재령이씨 입향조인 이애의 손녀와 혼인하여 예안에서 인량으로 이거하였다.

선산김씨 영해 입향조는 김석(金碩)인데 영해 못골에 입향하였다가 손자 김익중(金益重)이 인량에 처음 거주하게 되었다.

신안주씨의 인량리 입향 과정은 상세히 고증할 수 없으나 9대째 살고 있는 종택이 마을에 있다.

[여러 성씨가 어울려 사는 반촌]

인량리는 영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여러 명문가가 이 마을을 거쳐서 영해 지역에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특이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이 마을에는 여러 가문의 종택과 종가터가 남아 있어서 주민들은 흔히 ‘인량리 8종가’ 혹은 ‘나라골 8종가’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8종가의 구체적인 내용은 열거하는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여러 가문이 어울려 사는 모습은 성씨별 주민 구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1930년의 인량리 호구 총수를 보면 재령이씨 35호, 영양남씨 30호, 안동권씨 25호, 영천이씨 20호, 대흥백씨 8호, 기타 44호로 총 162호에 747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인량리에 여러 성씨가 혼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2년에 발간된 『영덕군 향토사』에는 재령이씨 20호, 안동권씨 24호, 영천이씨 12호, 영양남씨 12호, 함양박씨 24호, 일선[선산]김씨 20호, 평산신씨 9호, 영해박씨 7호, 무안박씨 6호, 파평윤씨 5호 등으로 성씨 구성과 가구 수에는 다소 변동이 있지만, 여전히 여러 성씨가 함께 거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종족이 공존하고 있는 모습은 최근에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 웃나라골[인량2리]에 한정된 자료이지만 2004년 말의 성씨 분포를 보면 함양박씨 14호, 재령이씨 13호, 안동권씨 10호, 평산신씨 10호, 신안주씨 4호, 파평윤씨 3호, 나주임씨 3호, 영양남씨 2호, 평해황씨 2호, 영천이씨 2호, 기타 10호[미상 3호 포함]로 총 73호에 147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인량리는 반촌이면서도 전형적인 각성촌락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대체로 한국의 반촌은 한 성씨나 두 성씨가 지배적인 종족촌락을 형성하고 있는 일반적인 경향에 비추어 보면 인량리는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혈연과 신분의 경계를 뛰어넘는 주민들의 사회관계]

특정 조상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혈연적 정체성과 양반의 지위를 계승하였다고 하는 신분의식을 뚜렷이 지니고 있는 여러 성씨가 한 마을에 모여 사는 인량리에서는 동제의 운영이나 장례조직, 노인들의 교유관계 등에서도 여느 반촌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동제는 마을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공동체 의례이지만, 반촌의 동제 운영방식은 마을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동제를 지내지 않는 마을[경주 양동마을]이 있는가 하면, 동제는 타성들 중심으로 운행하고 양반은 참여하지 않는 마을[안동 하회마을]도 있다. 동제의 제당을 나누어서 양반 신분을 배경으로 하는 중심 종족과 상민 신분을 배경으로 하는 타성이 따로 동제를 지내는 마을[영해면 호지마을]도 있고, 오랜 세월 세거해 온 양반 종족이 제관을 전담하여 타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제약하는 마을[영해면 원구마을]도 있다. 어느 경우에나 신분적 경계를 뚜렷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량리에서는 동제의 운영에 이러한 신분적 구별이 보이지 않는다. 인량리에는 12동신을 모셨다고 할 만큼 여러 개의 동제당이 있었는데 주민들은 집 가까운 제당에 자발적으로 참여해서 동제를 지냈다. 동제 집단의 크기가 작은 경우에는 서너 가구에서 큰 경우에는 오십 가구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동제 참여나 제관의 선임, 동제의 운영에 성씨나 신분적인 제약은 없었다. 인량리 동제 조직은 혈연이나 신분보다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근린성에 기초를 두고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결합하는 이런 모습은 장례조직에서도 나타난다. 한국 농촌에서는 장례시의 상호부조를 위해 상포계·상조계·초롱계·친목계 등으로 부르는 조직을 운영해 왔는데, 조직 형태나 운영 방식은 마을의 특성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주민들의 신분 배경에 따라 집성 양반 중심으로 조직을 운영하고 필요한 노동은 상민 출신의 타성들이 제공하는 경우도 있고, 중심 종족과 타성이 따로 장례조직을 결성해서 운영하는 경우도 있다. 집성 양반 종족이 복수인 경우에는 성씨별로 장례조직을 운영하기도 한다. 여러 반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러한 사례들은 장례조직에서도 혈연과 신분의 경계를 뚜렷이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인량리에서는 장례조직의 형성과 운영에 혈연의식이나 신분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인량2리[웃나라골]의 예를 보면, 지금은 주민이 줄고 화장이 보급되면서 장례조직도 거의 소멸하였지만, 과거에는 마을 안의 도랑과 골목을 경계로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서 장례조직을 운영하였다. 각 구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성씨나 신분 배경에 구애받지 않고 장례조직에 참여하였다. 혈연의식이나 신분의식이 그만큼 희석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 농촌에는 마을마다 성별·연령별로 구분된 여러 개의 사랑방이 있어서 한가한 시간에 모여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사교활동을 해왔는데, 반촌에서는 혈연의식과 신분의식이 강하여 같은 성씨끼리 모이거나 같은 신분끼리 모이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인량리에서는 주민들의 의식 속에 혈연의식과 신분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들의 교유관계에서는 이러한 구분의식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는다.

마을회관에 모인 노인들의 면면을 보면 여러 성씨가 다양하게 섞여 있다. 남녀 간에 방을 구분하여 내외관념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만 특정한 성씨들만 따로 모이거나 반상을 구분하는 모습은 발견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대화할 때는 자기 종족에 대한 긍지와 신분적 정체감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만, 노인들의 교유 현장에서 이러한 의식이 두드러지게 표출되지 않는 것은 여러 성씨가 오랜 세월 한마을에서 함께 생활하는 동안 혈연적 배타성과 신분적 우월감이 많이 희석된 것으로 보인다.

[전통문화의 학습장]

지역사회에서 높이 평가받는 여러 성씨가 오랜 세월 함께 생활하고, 여러 가문의 종가가 터를 잡아 살아오는 동안 인량리에는 선조들의 삶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여러 가문의 종택을 비롯한 고가옥들이 즐비하고, 조상들이 남긴 문적들이 소중한 문화자료가 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자료들은 각종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여러 기관에 기탁되어 보호되고 있다.

재령이씨 영해파 종택인 충효당(忠孝堂)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선산김씨 인량리 입촌조인 용암 김익중(金益重)의 종택은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재령이씨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종택은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등록된 것으로는 평산신씨 종택 만괴헌(晩槐軒), 장수현감을 지낸 권만두(權萬斗)의 고택 지족당(知足堂), 재령이씨 우계파 종택(愚溪派宗宅), 풍기군수와 승문원판교를 지낸 권상임(權尙任)의 살림집 강파헌 정침(江坡軒正寢), 영천이씨의 종택인 삼벽당(三碧堂) 등의 고가옥과 정담장군 정려비(鄭湛將軍旌閭碑)가 있다. 이 외에도 누정(樓亭)과 재사(齋舍)가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또 각 가문에서 소장했던 각종 고문서와 고서화는 한국국학진흥원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 기탁되어 소중한 전통문화의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신안주씨 종택 소장의 고문서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러한 문화 자원을 활용해서 청소년과 관광객에게 농촌 생활을 체험하고 전통문화를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을에서는 2004년부터 전통테마마을을 운영하고 있다. 폐교된 인량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여 현대식 시설을 갖춘 객실과 회의실을 마련하고, 종가와 고건축물 둘러보기, 고택 체험 민박, 전통 예절교육, 전통 민속놀이, 농작물 수확 체험 등 계절별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주말이면 탐방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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