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5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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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彭孫 |
영어공식명칭 | Yang Pang-son |
영어음역 | Yang Pang-son |
영어공식명칭 | Yang Pang-son |
이칭/별칭 | 대춘(大春),학포(鶴浦),혜강(惠康)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욱 |
출생 시기/일시 | 14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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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10년 - 양팽손 생원시 합격 |
활동 시기/일시 | 1516년 - 양팽손 식년 문과 급제, 현량과 발탁 |
활동 시기/일시 | 1544년 - 양팽손 용담현령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545년![]() |
추모 시기/일시 | 1630년 - 양팽손 죽수서원 배향 |
추모 시기/일시 | 1818년 - 양팽손 용강서원 추향 |
출생지 | 양팽손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
묘소|단소 | 양팽손 묘소 -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
사당|배향지 | 죽수서원 - 전라남도 화순군 한천면 학포로 1786-45[모산리 산15-3] |
사당|배향지 | 용강서원 -
전라남도 순천시 금곡동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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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문관 |
성별 | 남 |
본관 | 제주 |
대표 관직 | 정언|전랑|수찬|교리|용담현령 |
조선 전기 순천의 용강서원에 배향된 문관.
양팽손(梁彭孫)[1488~1545]의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대춘(大春), 호는 학포(鶴浦),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양팽손은 직장 양사위(梁思渭)의 증손자이며, 할아버지는 증 사복시정 양담(梁湛)이고, 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이다. 어머니는 해주최씨(海州崔氏)로, 증 조위사직 최혼(崔渾)의 딸이다. 양팽손은 1488년 능성(綾城)[현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서 출생하였다.
양팽손은 1510년(중종 5) 조광조(趙光祖)[1482~1519]와 함께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으며,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었다. 이후 정언(正言)·전랑·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의 주요 관직을 역임했으며,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기도 하였다. 양팽손은 정언으로 재직할 때 이성언(李誠言)을 탄핵한 일로 인해 대신들의 의계(議啓)로써 직책이 갈렸지만, 조광조·김정(金淨)[1486~1521] 등 신진 사류들로부터 언론을 보호한 인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양팽손은 1519년(중종 14)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연명(聯名)으로 올리는 상소에 맨 먼저 이름을 적은 사람]가 되어 중종에게 상소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삭직되어 고향인 능주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이 무렵 친교를 맺은 인물들은 기준(奇遵)[1492~1521]·박세희(朴世熹)[1491~?]·최산두(崔山斗)[1483~1536] 등의 기묘명현(己卯名賢)이었다. 특히, 능주로 유배되어 온 조광조와는 매일 경론을 탐구하며 지냈다.
양팽손은 1539년(중종 34)에 다시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544년(인종 즉위년) 김안로(金安老)[1481~1537]가 사사당한 후,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잠시 부임했다가 곧 사임하고 1545년 58세로 죽었다.
양팽손은 13세 때 송흠(宋欽)[1459~1547]에게 나가 공부했으며 송순(宋純)[1493~1582]·나세찬(羅世贊) 등과 동문으로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항상 『소학(小學)』·『근사록(近思錄)』 등을 처신의 지침으로 삼았고, 당시 신진 사류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양팽손은 회화에도 일가견을 보여 안견(安堅)의 산수화풍을 계승하였다. 작품으로는 「산수도」 1점이 전하며, 저서로는 『학포유집(學圃遺集)』 2책이 전한다. 『학포유집』은 시문집으로 1841년(헌종 7)에 양찬영이 편집·간행하였다.
양팽손의 묘소는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에 있다.
양팽손은 1630년(인조 8) 김장생(金長生)[1548~1631] 등의 청으로 능주의 죽수서원(竹樹書院)에 배향되었으며, 1818년(순조 18) 순천의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추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