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600568 |
---|---|
한자 | 慶州鄭氏 |
영어공식명칭 | Gyeongju Jeong Clan |
영어음역 | Gyeongju Jeong Clan |
영어공식명칭 | Gyeongju Jeo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남도 순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욱 |
입향지 | 경주정씨 입향지 - 전라남도 순천시 |
---|---|
세거|집성지 | 경주정씨 집성지 -
전라남도 순천시 황전면 회룡리
![]() ![]() ![]() ![]() ![]() |
묘소|세장지 | 옥계서원 -
전라남도 순천시 연향동
![]() |
성씨 시조 | 지백호 |
입향 시조 | 정내 |
지백호를 시조로 하고 정내를 입향조로 하는 전라남도 순천시의 세거성씨.
경주정씨는 지백호(智伯虎)를 시조로 한다. 지백호는 신라를 구성한 사로(斯盧) 6촌 중의 하나인 자산 진지촌(珍支村)[옛 본피부(本彼部)] 촌장이었다. 고려시대 때 정진후(鄭珍厚)가 문과에 급제하여 병부상서 겸 군기시윤(兵部尙書兼軍器寺尹)을 지내고 월성군(月城君)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정진후를 중시조로 하여 본관을 경주로 삼고 있다. 후손은 문헌공파(文獻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 월성공파(月城尉派), 평장공파(平章公派) 등 4파로 나뉘었다. 문헌공파 중 노송정(老松亭) 정지년(鄭知年)[1395~1462]의 후손은 따로 분파하여 노송정파를 형성하였다. 순천 지역에 세거하는 경주정씨는 문헌공파 중 노송정공파에 속한다.
경주정씨 노송정공파 파조인 정지년의 증손자 정내(鄭鼐)[1491~1548]가 16세기 초 남원 지역에서 순천 지역으로 이거 하면서 세거하였다. 정내의 정확한 입향 시기와 동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기묘사화 때 정내의 외가인 남원의 ‘다라실 정씨’가 화를 당하면서 ‘다라실 정씨’ 일족이 순천 지역으로 이거 한 사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함께 남하한 정내가 개성왕씨 왕침(王琛)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순천 지역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정내는 입향 이후부터 순천 지역 사족의 우대를 받았으며, 정내의 아들 정승복(鄭承復)[1520~1580]은 무과에 급제한 후 지방관을 역임한 뒤 지금의 순천시 옥천동에 퇴거하여 지냈다. 이때 을사명현 임억령(林億齡)[1496~1568], 미암 류희춘(柳希春)[1513~1577]과 교유할 만큼 지역적 기반을 갖추었다.
경주정씨가 순천 지역에서 확고한 기반을 갖추게 된 것은 입향 3세에 의해서였다. 정승복은 6형제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정사익(鄭思翊)[1542~1588]은 승평사은의 일원으로 유명하였다. 그리고 동생인 정사준(鄭思竣)[1553~?]과 정사횡(鄭思竑)[1563~1640], 정사정(鄭思靖)[1565~?], 정사립(鄭思立)[1564~?], 정사익의 아들 정빈(鄭𢣐)[1566~1640], 정사준의 아들 정선(鄭愃)[1577~?] 등이 모두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1545~1598]의 휘하에 종군하였다. 이순신이 정사준과 정사준의 형제자질의 군공과 관련한 장계를 세 차례에 걸쳐 올렸을 만큼 뚜렷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 경주정씨는 옥천조씨, 양천허씨 등과 연혼관계(連婚關係)를 맺으며 순천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세족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졌다. 이후 정승복의 후손들은 노송정공파에서 다시 옥계공파로 분파하여 그 정체성을 확고하게 형성하고 있다.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의 성씨』[『朝鮮の姓』]의 순천군조에는 경주정씨가 황전면 회룡리에 80세대, 주암면 요곡리와 고산리에 57세대, 별량면 대곡리에 48세대, 도사면 안풍리와 인월리에 73세대 등 258세대가 거주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경주정씨는 7503명이 순천 지역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옥계서원은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53년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연향동 명말마을에 복원되었다. 옥계서원은 노송정 정지년을 주벽으로 정승복, 정사준, 정사횡, 정빈, 정선 등 6명을 배향하고 있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이다. 경주정씨 종가에는 분재기를 비롯한 교지, 추증교지 등 고문서도 다수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