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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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澈 |
이칭/별칭 | 계함(季涵),송강(松江),문청(文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범호 |
출생 시기/일시 | 1536년 - 정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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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61년 - 정철 진사시 장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62년 - 정철 문과 장원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566년 - 정철 함경도 암행어사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78년 - 정철 장악원 정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80년 - 정철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89년 - 정철 우의정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591년 - 정철 진주에 유배 |
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정철 왕을 의주까지 호종 |
활동 시기/일시 | 1593년 - 정철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옴 |
몰년 시기/일시 | 1593년 - 정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827년 - 정철 어암 서원에 배향 |
출생지 | 정철 출생지 - 서울 장의동[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
유배|이배지 | 정철 유배지 - 진주 |
유배|이배지 | 정철 이배지 - 강계 |
묘소|단소 | 정철 묘소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송강로 523[봉죽리 531] |
사당|배향지 | 어암 서원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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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배향지 | 송강 서원 -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해곡리 |
사당|배향지 | 오천 서원 - 경상북도 포항시 오천면 원리 |
성격 | 문관|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연일(延日) |
대표 관직|경력 | 우의정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어암 서원에 배향된 조선 전기의 문관이자 학자.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아버지는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정유침(鄭惟沈)이다.
정철(鄭澈)[1536~1593]은 1536년(중종 31) 서울 장의동(藏義洞)[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서 출생하였다. 인종(仁宗)의 귀인(貴人)[후궁]인 큰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의 부인이 된 둘째 누이로 인하여 어려서부터 궁중에 출입하면서 어린 경원 대군(慶原大君)[명종]과 친숙하였다. 10세 때인 1545년(명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로 계림군(桂林君)이 관련되어 아버지가 유배당할 때 관북(關北)·정평(定平)·연일 등 귀양지를 따라다녔다. 1551년(명종 6)에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 담양 창평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였고, 김윤제(金允悌)의 문하가 되어 성산(星山) 기슭의 송강(松江) 가에서 10년 동안 수학할 때 기대승(奇大升)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배우고 이이(李珥)·성혼(成渾) 등과도 교유하였다.
1561년(명종 16)에 진사시에, 다음 해 별시 문과에 각각 장원하였다. 전적(典籍) 등을 역임하고 1566년(명종 21)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78년(선조 11)에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기용되고, 곧 이어 승지에 올랐으며 정파로는 서인(西人)에 속하였다. 진도(珍島) 군수 이수(李銖)의 뇌물 사건으로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580년(선조 13)에 강원도 관찰사로 등용되었고, 이후 3년 동안 전라도와 함경도의 관찰사를 지내면서 시 작품(詩作品)을 많이 남겼다. 이 때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고, 시조 『훈민가(訓民歌)』 16수를 지어 널리 낭송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5년(선조 18)에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 4년 동안 작품 생활을 하였다. 이 때 『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 등 수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
1589년(선조 22)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 세력을 추방하였고, 다음 해 좌의정에 올랐다. 1591년(선조 24)에 건저 문제(建儲問題)[1591년 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정치 문제]를 제기하여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하였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였다. 이 때 선조는 인빈 김씨에게 빠져 있던 터라 그녀의 소생인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고 말았다. 진주(晉州)로 유배되었다가,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移配)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부름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 다음 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얼마 후 동인들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江華)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면서 만년을 보내다가 1593년(선조 26) 세상을 떠났다.
당대 가사 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국 시가 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松江集)』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松江歌辭)』가 있다. 『송강집』은 1894년(고종 31)에 간행한 것이다. 『송강가사』는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城本)·관북본(關北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의 다섯 종류가 알려져 있다. 그 중 관북본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도 책의 일부만 전한다. 필사본으로는 『송강 별집 추록 유사(松江別集追錄遺詞)』와 『문청공 유사(文淸公遺詞)』가 있다. 시조 70여 수가 전한다.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송강로 523에 있다. 봉분(封墳)의 크기는 높이 1.6m, 둘레 20m이며, 묘비(墓碑), 상석(床石), 문인석(文人石), 망주석(望柱石), 송강 시비(松江詩碑), 송강 정철 신도비[충청북도 유형 문화재 제187호] 등이 있다.
순창의 어암 서원(魚巖書院)을 비롯하여 창평(昌平)의 송강 서원, 연일의 오천 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