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908 |
---|---|
한자 | 柳伯淳 |
영어음역 | Yu Baeksun |
이칭/별칭 | 위촌(葦村),류백순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춘진 |
활동 시기/일시 | 1376년![]() |
---|---|
활동 시기/일시 | 1406년![]() |
활동 시기/일시 | 1408년 1월![]() |
활동 시기/일시 | 1408년 10월![]() |
활동 시기/일시 | 1410년![]() |
활동 시기/일시 | 1419년![]() |
몰년 시기/일시 | 1420년![]() |
추모 시기/일시 | 1832년![]() |
사당|배향지 | 송곡서원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무학로 1419[애정리 495]![]()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서산 |
대표 관직 | 인령부윤행성균관대사성 |
고려 말 조선 초 서산 출신의 문신.
유백순(柳伯淳)[?~1420]은 조선 개국 후 어지러운 정치 질서를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학문과 경서에 뛰어나 성균관대사성을 지냈으며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또한 효경과 절의로 이름이 높았다.
본관은 서령[서산]. 호는 위촌(葦村). 아버지는 유방택[류방택, 柳方澤]이고, 형은 유백유(柳伯濡)이다.
유백순은 형 유백유와 함께 이색(李穡) 밑에서 공부하였는데, 사람들은 형제를 ‘유씨쌍벽(柳氏雙璧)’이라고 불렀다. 1376년(우왕 2) 병진방(丙辰榜)에 병과(丙科) 3위로 합격하였고, 조선 개국 후 1406년(태종 6)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408년(태종 8) 좌사간대부로 있을 때, 반란을 꾀한 죄로 제주에 유배된 왕의 처남들인 민무구(閔無咎)와 민무질(閔無疾)을 엄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파직된 간관[국왕의 옳지 못한 처사나 잘못에 대해 간언하는 관리] 안속(安束) 등을 용서하여 언로(言路)를 열어 놓을 것을 청하였다.
역모 죄인인 목인해(睦仁海)의 참형을 늦출 것을 청하였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 사헌부대사헌 맹사성 등과 함께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 1410년에는 시무 7개 조목을 임금께 올렸다. 1419년(세종 1) 인령부윤행성균관대사성(仁寧府尹行成均館大司成)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죽었다.
유백순이 죽자 세종은 관곽(棺槨)과 종이 70권을 내리면서 ‘성품이 굳세고 곧으며 경전에 밝고 역사에 통달하였으며, 오랫동안 국학(國學)의 장관으로서 후학 양성에 힘써 많은 문사가 그의 아래서 나왔다.’라고 칭송하였다. 유백순의 아버지인 유방택과 형 유백유가 제향된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495번지 송곡사[현 송곡서원]에 1832년(순조 32) 추가로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