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401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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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慶州鄭氏 |
영어공식명칭 | Gyeongju Jeong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성주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감병훈 |
본관 | 경주 - 경상북도 경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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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향지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 |
세거|집성지 |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 |
성씨 시조 | 정진후 |
입향 시조 | 정교악 |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정진후(鄭珍厚)를 시조로 하고, 정교악(鄭喬岳)을 입향조로 하는 세거 성씨.
경주 정씨(慶州鄭氏)는 신라 6성의 하나로 비조(鼻祖)는 사로국 6부촌 중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의 촌장이었던 지백호(智伯虎)이다. 32년(유리이사금 9) 진지부가 본피부(本彼部)로 개칭되면서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졌는데, 이때 정씨(鄭氏) 성을 사성(賜姓)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 뒤 42세손 정진후가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내면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관향을 경주로 정했다. 경주 정씨는 우리나라 모든 정씨의 대종(大宗)으로써, 경주에서 분파한 정씨가 30여 성에 이른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었던 양경공(良景公) 정희계(鄭熙啓)[?~1396]는 5형제를 두었는데, 그중 3남인 정지례(鄭之禮)[1398~1465]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정지례의 장남인 정수덕(鄭守德)은 현감공파의 파조가 되었는데, 그의 손자인 간성군수(杆城郡守) 정명선(鄭明善)의 장남이었던 정탁(鄭擢)도 황산공파(黃山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경주 정씨 입향조인 정교악은 바로 정탁의 손자이다. 정교악은 소과에 입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1728년(영조 4) 무신난(戊申亂)[이인좌·정희량의 난]이 발생하자 화를 피해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는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를 지나가다가 거미줄에 이슬이 맺힌 땅을 보고 노산(露山)이라 이름을 짓고 정착하였고 이때부터 후손들이 성주에 세거하게 되었다.
2015년 인구통계에 의하면,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후평리 등지에 90명이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