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92
한자 宋奎
영어공식명칭 Song Gyu
이칭/별칭 추(樞),홍욱(鴻煜),도군(道君),규선(圭善),규(奎),정산(鼎山)
분야 종교/신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0년연표보기 - 송규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917년 - 송규 원불교 교조 박중빈 만남
출가|서품 시기/일시 1918년 9월 - 송규 법명을 규로 하고 수위단 중앙 단원으로 활동
출가|서품 시기/일시 1919년 4월 - 송규 법호를 정산(鼎山)으로 함
출가|서품 시기/일시 1924년 - 송규 중앙총부 교정원 총무부장 취임
출가|서품 시기/일시 1927년 - 송규 서울교당 교무 취임
출가|서품 시기/일시 1928년 - 송규 영산지부장 취임
출가|서품 시기/일시 1933년 - 송규 중앙총부 교무부장 취임
출가|서품 시기/일시 1934년 - 송규 중앙총부 교정원장 취임
출가|서품 시기/일시 1942년 - 송규 중앙총부 교감 취임
출가|서품 시기/일시 1943년 - 송규 중앙총부 총무부장 취임
출가|서품 시기/일시 1943년 - 송규 제2대 종법사 취임
수학 시기/일시 1907년 - 송규 공산 송준필의 문인으로 수학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0월 - 송규 『건국론』을 발표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을 역설
몰년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송규 사망
출생지 송규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1길 35-5[소성리 464]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송규 수행처 -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용소길 258-22[소성리 112]지도보기
활동지 송규 활동지 - 전라북도 익산시
성격 종교인
성별
대표 경력 제2대 원불교 종법사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종교인.

[가계]

본관은 야성(冶城). 휘는 추(樞), 족보명은 홍욱(鴻煜), 본명은 도군(道君) 혹은 규선(圭善), 법명은 규(奎), 법호는 정산(鼎山). 아버지는 송벽조(宋碧照)이며 어머니는 이운외(李雲外)이다.

[활동 사항]

송규(宋奎)[1900~1962]는 1900년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서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1907년 8세부터 할아버지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9세에 『통감(通鑑)』을 공부하였다. 13세 때인 1912년 금수면 광대원리의 여청운(呂淸雲)과 혼인하였다. 14세 때인 1913년 이웃 마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성주 백세각(百世閣)[경상북도 유형 문화재]에서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에게 유학을 배우다가, 성리(性理)와 수도(修道)에 관심을 두고 가야산 등지에서 구도 생활을 하였다. 17세 때인 1916년 스승을 찾아 전라도 지방을 순력(巡歷)하던 중 정읍에서 보천교(普天敎) 교조 차경석(車京石)을 만났고, 18세 때인 1917년 원불교 교조 소태산(少太山) 대종사(大宗師) 박중빈(朴重彬)[1891~1943]을 만났다.

소태산 박중빈은 전라남도 영광 출신으로, 1916년 4월 28일 득도하여 8명의 제자와 함께 새 교단을 창립하였다[원불교 원기(圓紀) 1년]. 1917년 7월 송규를 영입하여 제자로 삼았고, 1924년 전라북도 익산에서 원불교의 전신인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를 창설하여 총재로 추대되었다. 박중빈은 유(儒)·불(佛)·선(仙) 3교와 그리스도교를 두루 섭렵하고, 그중 불법(佛法)이 제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종래의 불교와는 크게 다른 새 불교를 표방하고, 새 교단을 설립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불교의 현대화·생활화를 표방하고 신앙의 대상을 불상(佛像)이 아닌 법신불(法身佛)의 일원상(一圓相)으로 삼는 이른바 ‘생활 불교’를 주창하였다. 1917년 저축조합을 조직하고, 1918년부터 간척 사업을 시작하여 1919년에 8만 5950.41㎡ 규모의 논을 조성하였다. 이후 엿 공장, 과수원, 농축장, 양잠소, 한약방 등의 생산적인 경영을 통해 새 교단 창립의 경제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송규는 1918년 9월 소태산 대종사 박중빈의 9인 제자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1919년 4월 정산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1924년 중앙총부 교정원 총무부장, 1927년 서울교당 교무, 1928년 영산지부장, 1933년 중앙총부 교무부장, 1934년 중앙총부 교정원장, 1942년 중앙총부 교감, 1943년 중앙총부 총무부장을 역임하였다. 1943년 대종사 박중빈이 열반하자 법통을 계승하여 종법사가 되었고, 일제의 교단 해산과 황도 불교화 정책을 반대하며 회유와 강압을 거부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한편, 송규의 아버지 송벽조 대희사는 불교연구회 진안지부 교무로 재직하던 1940년, 조선을 유린하는 일제의 패도 정치에 분격하여 일왕에게 진정서를 보내 그 부덕함을 비판하여 소위 ‘불경죄’로 체포되었다. 당시 소태산 박중빈과 정산 송규도 연행되어 구금되었다.

1945년 10월에는 원불교 교리에 바탕을 둔 건국치민의 방법론인 『건국론(建國論)』을 정계 요인과 교단 동지들에게 발송하여 새로운 국가 건설을 역설하였다. 1948년 원불교 교헌(敎憲)을 제정하고 불법연구회를 개명하여 원불교로 선포하였다. 이어 민중 교육 및 구제를 위한 교육 사업으로 1951년 원광대학교와 원광중학교 등 다수의 학교를 설립했고, 복지 사업으로 양로원, 보육원, 장학회 등도 설립하였다. 1962년 63세로 사망하였다.

[사상과 저술]

『건국론(建國論)』[1945]이 있다.

[상훈과 추모]

원불교 성주성지에는 제2대 종법사 정산 송규의 생가[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464]와 성장터[소성리 415], 구도처[소성리 119] 등이 있다. 구도처인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119[박곡, 성적지 22]에는 정산 송규의 기도터인 거북 바위가 있고, 원불당과 대각전이 건립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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