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9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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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姜圭贊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웅철 |
출생 시기/일시 | 19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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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27년 - 강규찬 신도소년단에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강규찬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 가입 |
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강규찬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섬유노조 칸사이지방 오사카지구 북지부 책임자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48년 - 강규찬 북한 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선출됨 |
출생지 | 강규찬 출생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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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항일운동가|사회주의 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북한 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 |
일제강점기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며, 사회주의 운동가.
1910년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출생으로 부인은 고진희, 아들은 강희진·강석진이다.
강규찬(姜圭贊)은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1927년 신도(新挑)소년단에 가입하여 애국사상을 배웠고, 이후 신도(新挑)청년단에서 활동하였다.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 천마(天馬)방직공장에 공원으로 노동일을 하면서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에 가입, 노동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을 하게 되었다. 1932년 말부터는 전협 섬유노조(全協纖維勞組) 간사이(關西) 지방 오사카 지구 북지부(大阪地區北支部) 책임자로 활동 중에 일경에 피검 투옥되었다.
해방 후 강규찬은 제주읍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남로당 제주도위원회에 조몽구(趙夢九)·안세훈(安世勳)·김유환(金瑬煥)·김용관(金龍寬) 등과 최고위원에 선출되어 여러 사건에 깊숙이 관여했다. 제주4·3사건 후에 부인과 함께 제주도를 탈출하여 김달삼[본명 이승진]과 함께 해주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했고, 1948년 부인과 함께 북한의 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뽑혔다.
그의 부인 고진희 또한 제주읍 삼도리 출신으로 1946년 3·1절 독립 만세 운동 기념식 시위로 체포되어 이듬해 5월 미 군정청의 재판에서 징역 5월과 벌금 2,000원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 등 남로당 제주도당 고위 당원이었다. 이들 부부 사이에 태어난 큰아들 강희진과, 북한 선박공업부 무역공사 과장으로 재직했던 차남 강석진이 북에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강규찬은 6·25 때 북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