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9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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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宇平 |
이칭/별칭 | 김상호(金相昊),금본우평(金本宇平)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월평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규복 |
출생 시기/일시 | 191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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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42년 - 김우평 불경죄 및 보안법위반으로 1년 4개월 언도, 수감됨 |
출생지 | 김우평 출생지 -
서귀포시 월평동 40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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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주|이주지 | 김우평 이주지 - 충청북도 청주시 문덕동 131번지 |
성격 | 독립운동가|교육자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교유(敎諭) |
일제 강점기 제주도 서귀포시 월평동 출신의 독립운동가·교육자.
김우평은 1917년 당시 제주도 중문면 월평리 44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이후에 충청북도 청주군 청주읍 내덕리 131번지로 이주하여 살았다.
김우평은 금본우평(金本宇平)으로 창씨개명하였고, 김상호(金相昊)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는 1942년 나이 25세로 청주공립사범학교[현재 청주교육대학교]에 교유(敎諭)의 신분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김우평은 당시 국사[일본사] 수업 시간 중에 “금반 중국이 피투성이로 배일(排日), 항일(抗日)로 대항하는 원인은 일찍이 의화단사변(義和團事變)에서 시작한다. 그때 권익을 독점하였던 일본의 변명은 참으로 졸렬했다.”고 하면서 일본은 침략주의 국가라고 비난하였다. 이런 김우평의 영향으로 강전수웅(岡田秀雄) 등 학생들은 일본인 학생들에 대하여 “지원병(志願兵)은 일본병(日本兵)보다 조선혼이 있기 때문에 강하다”고 말하고 “이토 히로부미 같은 놈은 암살당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 일로 김우평은 1942년 2월 2일 청주경찰서에 ‘불온언동(不穩言動)을 했다’는 죄목으로 강전수웅[16세] 등 4명과 함께 검거되어 수감되었다.
당시 사건을 판결하였던 「대전외 형사사건부」에는 ‘불경죄’와 ‘조선임시보안령위반’의 죄명으로 1942년 7월 1일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후 항고하여 1942년 11월 10일 2심에서는 징역 1년 4개월을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