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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곡리 국사봉 산신제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701220
한자 石谷里國師峯山神祭
영어공식명칭 Religious Ritual for the Mountain Spirit of Seokgokri Guksabong
이칭/별칭 국사제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석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종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중단 시기/일시 2007년 - 주민의 고령화와 일부 주민의 반대로 제의 중단
의례 장소 석곡리 국사봉 산신제 -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석곡리 국사봉 정상지도보기
성격 동제|산신제
의례 시기/일시 정월 자시
신당/신체 자연암반[국사봉 정상]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석곡리에서 정월에 마을 주산인 국사봉 산신에게 지내는 마을 제사.

[개설]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석곡리 사람들은 예로부터 국사봉 산신에게 마을 평안과 주민 발복을 기원하며 제사를 지내었다.

매년 정월 초사흘과 보름 사이의 길일을 택하여 떡 한 시루, 돼지머리, 북어포, 삼색실과를 차려놓고 정성을 드렸다. 한때 소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석곡리 마을의 산신제 제의는 2007년에 중단되었다.

[연원 및 변천]

석곡리 마을은 300년 전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마을 형성에 맞물려 산신제를 지내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산신제가 시작된 것을 입증할 증거자료는 없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제사를 지낸 사례가 확인된다.

석곡리 마을 주민들은 산신제를 중시하여 2007년까지 제의를 지속하였다. 그러나 산신제를 주도하던 사람들이 고령화되고 숨지면서 제사 전승 인식이 약화되었다. 종교를 달리하는 일부 주민들의 반대로 제사를 폐지하게 되었다.

석곡리 국사봉 산신제는 본래 국사제로 추정된다. 산의 이름이 국사봉이란 점과 산제당 한 쪽에서 말[사기마, 놋쇠마]이 발견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세종 지역의 국사제는 조선 후기에 시작된다. 그런 점에서 석곡리의 제사는 조선 후기까지 연원을 소급하여 볼 수 있다.

[신당/신체의 형태]

석곡리 국사봉 산신제의 신당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국사봉 산상의 자연 암반을 제단으로 사용하였다. 별도의 신체는 없지만 제장의 한쪽에서 사기마와 놋쇠마가 발견되었다. 발견된 말은 천상에서 국사신을 태우고 내려온 중개자다. 발견된 말로 추론할 때 국사봉 산신제는 애초 국사제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절차]

제사는 제관의 주도로 진행된다. 절차는 분향강신-헌주-고축-동서남북 네 방향에 4배-소지올림 순이다. 소지는 대동소지를 먼저 사르고 제관 일행 소지-주민 소지-우마 소지 순으로 올린다. 제의 시간은 1시간 정도 소요된다.

제사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면 주민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맞는다. 제사 지낸 음식으로 제관 일행과 주민들이 함께 음복한다.

[현황]

비교적 오랜 역사성을 보유하고 있는 석곡리 국사봉 산신제는 2000년대 초반까지 활기차게 전승되었다. 그러다가 2007년에 주민들의 고령화와 일부 반대자들의 의견으로 제사를 폐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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