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783 |
---|---|
한자 | 姜麟祥 |
영어음역 | Kang Insang |
이칭/별칭 | 응지,월당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송만오 |
조선 중기 전라북도 남원 출신의 의병.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응지(應趾), 호는 월당(月塘). 은열공 강민첨(姜民瞻)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찰방 강근(姜瑾)이다.
강인상은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었고, 지조와 절개가 굳세었다. 1576년(선조 9)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제수되었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아들인 판관 강희원(姜希元), 통덕랑 강희복(姜希復)과 함께 천여 명의 의병을 모아 종질 강절(姜節)이 있는 단성의 관아로 달려가서 그 방어의 계책을 세웠다.
그때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찾아와서 회견하였는데, 그의 계책에 감탄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는 격문을 발하여 사천과 곤양 등지에서 의병을 모아 부다현(富多峴)에 매복하였다가, 적병이 이르자 두 아들과 함께 나아가서 많은 적병을 죽였다.
1593년(선조 26)에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이 그의 지략을 듣고 종사관에 임명하였다. 그는 휘하의 병사들과 두 아들, 그리고 조카 강희보·강희열 등과 함께 전주에 들어가서 성을 지키는 데 기여하였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숙성치에서 적을 막아내다가 후퇴하여 남원성으로 들어가, 정기원(鄭期遠)·이복남(李福男)·임현(任鉉) 등과 함께 같은 날 전사하였다. 조카인 판관 강희국(姜希國)도 그를 따라 함께 죽었다.
조정에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