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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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桂洞里 |
영어음역 | Gyedong Maeul |
영어의미역 | Gyedong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계동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병담 |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에 속하는 계수리를 관할하는 행정리.
계동리는 수동리와 함께 법정리인 계수리에 속해 있다. 마을 앞에 소하천이 흐르는 낮은 산악 지대로 형성되어 있으며, 전답이 즐비하여 오곡이 풍부하고, 울창한 소나무림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계동리는 본래 남원군 사동면 계동 지역으로, 계수나무가 있고, 계화낙지 명당이 있어 계수동 혹은 계동이라 하였다. 이 마을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1770년경 지사방에서 거주하던 채규권의 7대 조부 채영국이 당시 만석을 가진 큰 부자였는데, 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하고 주변의 가난한 주민들에게 선덕을 베풀었다. 어느 날 부모의 명당을 찾지 못하고 고심하던 중 선각대사와 대화할 기회가 있어 함께 명당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비암골(지금의 인화리)이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더니 선각대사가 하는 말이 “명당이 바뀌었구나!” 해서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현지로 가자고 했다.
그 명당으로 와서 선각대사가 하는 말이, “복치명당(꿩이 업드린 형상의 명당)이 위에 있고, 계화명당(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선이 놀다 심은 나무)이 아래에 있어 서운하기는 하나, 위치가 서로 비켜 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면서 복치명당이 부모님 운세에 맞으니 묘를 쓰라고 했다.
하지만 묘 옆에는 절대 무거운 비석이나 망주를 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그래서 현재까지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할아버지가 부모님의 묘를 쓰고 그 옆에 시묘초막을 지어 살다가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본래 마을 이름은 채씨가 시묘살이를 한 골짜기의 이름을 따서 제정골, 또는 대습지라고도 불렀다. 그 후 제정골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제도라 이름지어 부르다가 얼마 지나 계수나무가 있고, 계화낙지의 명당이 있다고 하여 계동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 다음과 같은 일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백제의 장군이 풍악산에서 전쟁을 하는데, 신라 군사 25만 명이 침입하였다. 승산이 없어 고심하던 중 꿈에 백제 장군이 큰 고목나무 옆을 지나가는데, 이름 모를 도사가 나타나서 적군의 정황을 자세히 알려주고, 지세를 이용하는 비법을 알려주어 이튿날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 후 장군은 꿈에서 본 고목나무 밑에 집을 짓고 살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이 장수가 채씨의 20대 조부라 한다. 그 후손들이 장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이곳에 당도해보니 산수가 좋아 자리를 잡고 정착하여 오늘날 계동리가 되었다고 한다.
계동리에서는 1730여 년경 알 수 없는 국가의 별난으로 인해 피난차 이곳에 온 여씨(呂氏)가 은신하여 정착한 뒤 40여 년간 살다가 떠났다. 이 후 1770여 년경 평강채씨(平康蔡氏)가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오늘날 집성촌을 이루고 있고, 박씨·강씨·최씨·장씨·이씨 등 5개 성씨가 함께 살고 있다.
계동리는 사매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5㎞에 이르며, 전체적으로 낮은 산악지대 및 구릉지대로 형성되어 있다. 전답이 즐비하여 오곡이 풍부하고, 산림 전체가 울창한 소나무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29세대이며, 53명의 노인이 거주하는 농촌 부락이다. 예전에 비해 인구가 많이 감소되었다. 총면적이 190.9㏊로 사매면 전체의 5.8%를 차지한다.
전답 비율은 밭이 8.5㏊로 농경지의 23.7%이고, 논이 27.5㏊로 농경지의 76.3%을 차지하고 있다. 임야는 129.6㏊로 총 면적의 67.8%이고, 기타 25.3㏊로 총 면적의 13.2%이다. 이곳은 쌀농사를 위주로 하는 전업농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에 소하천이 흐르고 있어 식용수 및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으며, 해발은 250m이다. 교통으로 계동~율정 간, 계동~인화 간 도로가 있어 인근 마을과 교류하기 쉽고 영농에 편리하며, 남원시내로 통하는 시내버스 노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