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산 고구려 유적 발굴의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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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Sequal of excavation of Goguryeo remains in Achasan
분야 역사/ 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구리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집필자 최종택

    [상세정보]

    [정의]
    경기도 구리시 아차산에서 1997년부터 진행된 고구려 유적 발굴에 관한 이야기.

    [개설]
    아차산은 서울시과 구리시에 걸쳐 있는 높이 286.8m의 야트막한 산이다. 지표 조사 결과 고구려 군사 유적이 확인되어 1997년부터 남한 최초로 고구려 유적 발굴을 시작하였고, 2004년에는 국가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구려를 만나다]
    고구려 유적을 만나기 위해 1997년 9월 22일 오후 아차산 정상의 속칭 헬기장으로 불리던 곳에서 간단한 행사가 있었다. 1,450여 년 동안을 그곳에 묻혀 있던 고구려 유적의 발굴을 고하는 개토제였다. 서기 475년 백제 한성(漢城)을 함락시킨 고구려 장수왕의 군대가 남기고 간 토기임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백제 고분으로 알려졌던 구의동 유적이 고구려 군사 요새였음이 밝혀졌다. 잠실 대교 북단에 위치한 구의동 유적은 1976년에 발굴되었는데, 발굴 조사 당시에도 군사 시설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백제 고분으로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던 유적이다. 중국이나 북한의 고구려 유적과 유물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던 당시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결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를 계기로 남한 지역 고구려 토기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확인되었고, 학계의 관심이 증폭되었다.

    1994년 4월 구리시·구리 문화원과 한양 대학교 조사단이 공동으로 실시한 아차산 일원에 대한 지표 조사에서 15개소에 달하는 고구려 보루가 확인되었으며, 1997년에는 그중 하나를 발굴하였다. 1997년에 시작된 아차산 4보루의 발굴 조사는 이듬해까지 지속되었고, 1999년부터 2000년까지는 시루봉 보루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아차산 4보루의 발굴은 남한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라는 점에서 각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1997년도의 발굴 조사 결과는 엠바고를 깨고 주요 일간지의 일면을 장식하였으며, 보도 이후 발굴 조사 현장에는 연일 학계는 물론 많은 시민들이 방문하였다. 아차산 4보루 발굴 조사를 계기로 경기도 양주와 임진강 일대에서 많은 수의 고구려 보루가 추가로 확인되었으며, 남쪽으로는 대전에 이르기까지 고구려 유적이 조사되었다. 또한 2002년 중국의 '동북 공정'은 아차산 고구려 유적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004년에는 아차산고구려 유적이 국가 사적 제455호로 지정되었다. 홍련봉 1보루와 홍련봉 2보루, 아차산 3보루, 용마산 2보루에 대한 발굴 조사가 연속적으로 이루어졌다. 2013년까지 지속된 발굴 조사를 통해 이제는 한강 유역을 둘러싼 고구려와 백제의 각축 양상을 비교적 자세히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고구려 잠에서 깨어나다]
    1500여 년 전인 서기 475년 9월, 고구려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백제의 왕도 한성을 포위하였다.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두려워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고구려는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양쪽에서 공격하였고, 또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고구려의 대로(對盧) 제우,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 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성 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개로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났다. 과거 개로왕의 신하였다가 고구려에 망명한 장수 재증걸루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이상은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 본기(百濟本紀) 개로왕 21년 조에 나오는 백제의 한성 함락 기사를 요약하여 정리한 것이다. 위 기사에서 북성은 한강 남안의 풍납토성(風納土城), 남성은 몽촌토성(夢村土城), 아차성아차산성(阿且山城)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백제 한성 시대는 막을 내리고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이후 80여 년간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남진 경영을 시도하게 되며, 몽촌토성과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대에 수십 개의 요새를 쌓았다. 그러나 551년 나·제 연합군의 공격으로 아차산고구려 군은 양주 방면으로 철수하였고, 고구려 군이 주둔하였던 요새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아차산 일대에는 모두 20개소의 고구려 군사 요새가 남아 있는데, 조사 전에 파괴된 것을 감안한다면 이보다 많은 수의 유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유적은 산성보다는 규모가 작고 기능이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보루(堡壘)라고 불린다.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아차산과 용마산 능선을 따라서 이어지고 있는 것들과 한강 변에 인접한 것들의 두 부류로 나뉘며, 모두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곳에 있다. 아차산 능선의 보루들은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봉우리의 정상을 중심으로 퍼져 있는데, 주변 지역, 특히 한강 남안의 몽촌토성과 풍납토성 일대를 조망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보루는 아차산과 용마산 줄기를 따라 두 줄로 배치되어 있으며, 이것은 지형적인 요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형상 아차산 능선에서는 서쪽의 중랑천변을 조망하기 어려우며, 반대로 용마산 능선에서는 동쪽의 왕숙천변을 조망하기 어렵다. 따라서 아차산 동서의 평지를 관할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2열의 보루를 축조해야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 보루들 사이의 거리는 400~500m가량으로 비교적 일정한 편이다. 각 보루는 목책(木柵)이나 석축 등의 시설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 조사된 보루의 구조를 통해 볼 때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는 외곽의 성곽과 내부의 건물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형 또는 타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성곽의 규모는 대소의 차이가 있으나, 외곽에 석축 성벽을 쌓고 내부에 건물 등의 시설물을 설치한 점에서는 동일한 구조를 하고 있다. 성벽은 보루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치석한 화강암 석재로 쌓았으며, 구의동 보루의 경우는 특이하게 성벽 상부는 강돌로 쌓았다. 성벽의 총연장 길이는 50m 내외에서 300m 이내의 규모이다. 발굴 조사된 보루 모두는 성벽에 고구려 특유의 방어 시설인 치(雉)가 설치되어 있는 점도 구조상의 특징이다.

    성벽 내부의 평탄지에는 군용막사로 이용된 여러 기의 건물과 저수 시설 및 배수 시설 등이 설치되었는데, 구의동 보루의 경우는 수혈식 건물이 1기 축조되었으며, 그 내부에 방형 저수 시설과 온돌 및 배수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아차산 제4보루시루봉 보루, 홍련봉 1보루에는 여러 기의 지상 건물이 설치되었는데, 구조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아차산 4보루의 경우는 모두 7기의 건물이 설치되었으며, 건물 내부에는 모두 12기의 온돌이 설치되었다. 7기의 건물은 모두 장방형의 평면을 하고 있으며, 일부를 제외하고는 돌과 점토를 섞어 쌓은 담장식 벽채이고, 그 위에 맞배식 지붕을 덮었다.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은 폭이 10m, 길이가 45m 되는 대형 건물지이다. 건물지의 네 벽은 모두 할석과 점토를 섞어서 쌓았으며, 동벽 가운데에 문비석(門扉石)이 놓여 있어서 이곳에 주 출입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 내부에는 중앙의 장축 방향으로 기둥구멍과 주춧돌이 배치되어 있어서 남북 방향의 보를 받치던 기둥이 세워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건물지 내부는 다시 여러 개의 공간으로 나뉘는데, 온돌 시설이 있는 방 3칸과 2기의 저수 시설 그리고 남쪽의 빈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지의 동벽과 서벽 가운데에는 각각 1개씩의 배수구가 설치되어 있어서 사용한 물을 성벽 밖으로 배출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건물지 내부에 설치된 온돌은 'ㄱ' 자형과 직선형의 두 종류가 있다. 온돌은 지금의 온돌과는 구조가 달리 벽난로와 같은 형태인데, 모두 외고래 형식으로 판석을 세워서 벽채를 만들고, 그 위에는 역시 납작하고 긴 판석으로 뚜껑을 덮은 뒤 짚을 섞은 흙으로 미장한 형태이다. 온돌의 아궁이는 온돌 고래와 직교하는 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는데, 아궁이 좌우에 좁은 판석을 세우고 그 위에 기다란 이맛돌을 올려서 아궁이를 만들었다. 온돌 아궁이 가운데에는 좁고 긴 돌을 세워 아궁이에 걸린 솥의 밑바닥을 받치도록 고안하였다. 그 밖에 아차산 4보루에는 간이 대장간도 설치되어 있어서 간단한 철기의 제작과 보수가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간이 대장간 주변에는 수리 중인 철기가 다양으로 발굴되었다.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보루에서는 많은 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이 토기류이다. 발굴이 진행 중인 홍련봉 1보루를 제외하고도 출토된 토기는 모두 24개 기종으로 분류되며,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토기까지 합하면 최소 개체 수만도 1,611개체에 달한다. 이들 각 기종은 그 용도에 따라 저장용, 조리용, 배식용, 운반용 등으로 사용된 실용기와 부장용이나 의례용으로 사용된 비실 용기로 대별되는데, 대부분 일상생활에서 사용된 실용기이다. 이들 토기류는 나팔 입항아리나 구형호 등의 변천 과정에 대한 분석에 따르면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에 사용된 것들이다. 그 밖에 접시를 비롯한 개인용 배식기에는 문자를 새긴 토기들도 출토되는데, 당시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토기류 외에 철기류도 많은 양이 출토되었는데, 무기류와 마구류, 농공구류 및 용기류 등으로 구성된 철기류도 1,688개체에 달하는 엄청난 양으로 자료가 부족한 고구려 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더구나 이들 자료는 역사적 정황으로 볼 때 백제의 한성이 함락되던 475년에서 나·제 연합군에 의한 한강 유역 회복이 있던 551년 사이에 속하는 것이므로 편년 자료가 부족한 고구려 고고학 연구에 있어 더욱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특히 아차산 4보루에서는 말 재갈과 경판 및 등자 등의 마구가 출토되어 고구려뿐만 아니라 삼국 시대 마구의 편년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밖에 소량이지만 벽돌과 기와류가 출토되는데, 벽돌은 구의동 보루에서만 출토되며, 기와류는 홍련봉 1보루에서만 출토되었다. 기와의 표면색은 적색이나 회색이며, 일부는 고온으로 소성되어 회청색을 띠며 경질인 것도 있다. 기와의 등문양은 대부분 승문(繩文)이며, 세로 방향으로 시문된 것이 일반적이다. 기와 내면에는 눈이 가는 포흔(布痕)이 찍혀 있으며, 이른 시기 기와의 특징인 모골흔(模骨痕)이 뚜렷하다. 기와를 만드는 바탕흙은 고운 점토이나 일부 모래가 섞인 것도 있다. 기와의 외곽은 대부분 2~3차에 걸쳐 정련하여 매끈하다.

    홍련봉 1보루에서는 다량의 기와와 함께 연꽃무늬 수막새가 3점 출토되었다. 3점 모두 동일한 기와 틀에 의해 제작된 것은 아니나 같은 양식에 속한다. 막새 면에는 단판 연화문과 변형 화판을 교대로 네 판씩 배치하였다. 연판(蓮瓣) 사이에는 8개의 삼각형 주문(珠文)을 도드라지게 새겼으며, 가운데 자방(子房)에는 2조의 돋을 테를 둘렀다. 이러한 와당은 남한 지역에서는 처음 출토되는 것으로 고구려에서 기와나 와당은 왕궁이나 사찰 및 관청 등 공공건물에만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홍련봉 1보루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아차산 일원의 보루들은 출토 유물의 연대와 역사적 정황으로 미루어 서기 551년 나·제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폐기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동안의 발굴 성과를 통해 볼 때 이들 보루가 폐기된 양상은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강 변에 입지한 구의동 보루의 경우 온돌 아궁이에 두 개의 철 솥이 걸린 채로 발굴되었으나, 아차산 4보루를 비롯한 아차산 능선상의 보루들의 경우 아궁이에 철 솥이 확인된 예는 하나도 없다. 또한 구의동 보루에는 다량의 무기류가 원래 위치에 놓인 채 완형으로 출토되었는데, 아차산 능선상의 보루에서는 파손된 무기 몇 점을 제외하고는 무기류가 출토되지 않았다. 또, 구의동 보루는 보루 전체가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다른 유적에서는 화재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점을 종합해 볼 때 구의동 보루는 갑작스런 기습으로 인하여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보루에 주둔했던 병사들은 전투 한번 해보지 못하고 전멸했다. 반면에 아차산 능선상의 보루에 주둔하던 고구려군은 구의동 보루를 비롯한 한강 변 보루들이 공격당하자 철 솥과 무기류 등 주요 장비는 거두어 철수하였다. 이후 이들 보루들 중 일부는 7세기 이후 신라군에 의해 재사용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은 땅속에 묻혀 1500년 전 한강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각축을 벌였던 삼국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게 되었다.

    그동안의 발굴 조사와 유물에 대한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아차산 일대 고구려 보루는 한강을 경계로 한 고구려의 최남단 방어 기지의 역할을 하였으며, 대략 500년을 전후한 시점에 축조되어 나·제 연합군의 공격이 있었던 551년에 폐기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또한 이들 각 보루에는 10명[구의동 보루], 50명[홍련봉 1보루], 100명[아차산 4보루, 시루봉 보루]의 단위로 군사들이 주둔했으며, 아차산 일원에 주둔했던 전체 군사의 수는 2,000여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보루의 입지와 기와 건물의 존재 등으로 보아 중심부대는 홍련봉 1보루에 주둔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볼 수 있다. 서기 475년 장수왕이 이끄는 3만의 고구려군은 7일간의 공격으로 풍납토성을 함락하고, 백제의 개로왕을 사로잡아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인다. 장수왕은 이내 남녀 포로 8,000명을 잡아 돌아가지만 고구려 부대 중 일부는 몽촌토성에 주둔하면서 남진을 시도하였다. 그 후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한강 유역으로 북상해 옴에 따라 500년 무렵에 고구려 군은 몽촌토성을 버리고 한강을 경계로 아차산 일원에 보루를 구축하였다. 한강을 경계로 대치하던 고구려 군은 551년 나·제 연합군의 공격으로 한강 유역을 포기하고 임진강 방면으로 이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차산 고구려 보루의 의미]
    아차산 일원 고구려 보루의 발굴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들 유적은 남한에서 처음으로 발굴된 고구려 유적으로 학술적인 면에서 고구려 고고학 또는 고구려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동안 남북 분단이라는 정치적인 상황으로 인해 우리 민족 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의 하나인 고구려에 대한 연구는 북한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 대한 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중국에서의 고구려 연구도 일부 시도되었지만 자료에 대한 접근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최근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국가적 사업의 일환으로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왜곡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차산 고구려 유적이 가지는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다. 아차산 일대의 고구려 보루의 발굴 성과는 북한의 개설서에도 반영되어 있을 정도로 관심이 높으며, 앞으로 고구려를 주제로 한 남북 간의 학술 교류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고구려 유적이 아차산에 밀집 분포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적이 등산로 개설과 군사 시설 및 체육 시설의 설치로 인해 훼손되고 있다. 세 곳의 유적이 발굴되었으나 아직 해명되지 않은 여러 문제를 밝히기 위해 앞으로의 추가 발굴이 필요하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발굴된 유적을 포함한 아차산 일원의 고구려 유적을 묶어 사적 공원화하고, 현장을 정비하여 답사 코스를 개발하며, 기념관과 박물관을 설치하는 등 종합적인 발굴 및 보존과 활용 대책의 수립이 절실히 필요하다. 이미 정비를 마친 한강 남안의 백제 유적지들과 연계하여 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고구려·백제 수학여행 코스의 개발도 고려해 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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