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 삼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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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淳昌三印臺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산27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용엽

    [상세정보]

    개축|증축 시기/일시 1963년 - 순창 삼인대 보수[1963]
    문화재 지정 일시 1973년 6월 23일연표보기 - 순창 삼인대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7호로 지정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7년 - 순창 삼인대 보수[1977]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7년 - 순창 삼인대 보수[1987]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1년 - 순창 삼인대 보수[1991]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1년 - 순창 삼인대 주변 정비[2014]
    현 소재지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산271 지도보기
    성격 비와 비각
    관련 인물 김정(金淨)[1486~1521]|박상(朴祥)[1474~1530]|유옥(柳沃)[1487~1519]
    크기(높이,길이,둘레) 164㎝[삼인대비 높이]|80㎝[삼인대비 폭]|24㎝[삼인대비 두께]
    소유자 문화 유씨 종중|경주 김씨 종중|충주 박씨 종중
    관리자 순창군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7호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에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김정 등이 중종폐비 신씨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문을 작성한 곳.

[건립 경위]
1506년(연산군 12)에 박원종(朴元宗)[1467~1510]·성희안(成希顔)[1461~1513] 등이 주동하여 연산군(燕山君)을 몰아내고 진성 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켰다. 박원종 등은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이 반정에 반대하였다며 숙청하였고, 이어 신수근의 딸인 중종(中宗)의 비 신씨(愼氏)를 폐위시켰다. 중종(中宗)윤여필의 딸[장경 왕후]과 재혼하였으나 장경 왕후는 왕자를 낳고 사망하였다. 이에 순창 군수 김정(金淨)[1486~1521]과 담양 부사 박상(朴祥)[1474~1530], 무안 현감 유옥(柳沃) 등 세 사람은 강천산에 모여 관인(官印)을 나무에 걸고 폐비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당시 김정박상, 유옥이 각자의 관인을 나무에 걸었다 하여 삼인대(三印臺)라고 부른다.

김정 등의 상소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나, 후일 신씨를 복위하여 단경 왕후(端敬王后)에 추증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단경 왕후는 1699년(숙종 25)에 현감 신규(申奎)신씨의 지위와 명호를 회복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에서 의견이 분분하여 시행되지 못하고 별묘(別廟)를 지어 받들기만 하였다. 이후 1740년(영조 16)에 다시 여러 신하가 모여 의논하고 임금이 결단하여 신씨의 호를 단경 왕후로 추상(追上)[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에 존호를 올리는 것]하고 태묘(太廟)에 올렸으며, 능을 온능(溫陵)이라 하였다. 순창 삼인대(淳昌三印臺)는 대의를 지키려는 이들의 선비 정신과 충절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이를 기리고자 1744년(영조 20)에 홍여통(洪汝通)·윤행겸(尹行謙) 등 순창군의 선비들이 발기하여 삼인대비를 세웠다.

[위치]
순창 삼인대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강천사 남쪽에 자리한다.

[형태]
삼인대비는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 안에 있다. 높이는 164㎝, 폭은 80㎝, 두께는 24㎝로 화강암 좌대에 대리석 비신이다. 비각 안에는 영조(英祖)·정조(正祖)의 어제 현판과 기우만이 쓴 「삼인대 비각 중수기」가 걸려 있다. 비문은 도암 이재(李縡)가 지었으며, 민우수(閔遇洙)가 글씨를 썼고, 유척기(兪拓基)가 전서를 썼다. 비문의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창 군수 충암(冲庵) 김정과 담양 부사 눌재(訥齋) 박상, 무안 현감 석헌(石軒) 유옥이 이곳에 모여 관인을 나뭇가지에 걸어 두고 중종반정 때 폐위된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작성하였다 하여 삼인대라 한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부인 신씨를 중전에 올렸으나 훈신 박원종 등이 중전의 아버지인 좌의정 신수근이 중종반정 과정에서 살해되었으므로 그 해가 자신들에게 돌아올까 우려하여 신씨를 폐위시키고 숙의 윤씨를 왕비로 삼았으니 이분이 장경 왕후였다. 그러나 10년 후에 장경 왕후가 승하하니 이때 많은 재이(災異)가 발생해 임금께서 신하들에게 바른 말을 널리 구하니, 이때 충암 등이 유지에 응하여 상소를 올려 신씨를 복위시킬 것을 청하는 한편 훈신들이 군부(君父)를 흔들며 국모를 폐위시켜 추방한 죄를 논열하였다.

상소가 접수되자 대간 이행(李荇) 등이 이들을 체포하여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상국(相國) 정광필(鄭光弼)이 힘껏 구명해 준 데 힘입어 도형(徒刑)[죄인에게 중노동을 시키는 형벌]에 처해진 뒤 귀양 가는 것에 그쳤는데 오랜 시일이 지난 뒤에야 유배에서 풀려났다.

처음 상소문의 초안을 잡을 당시 관직에서 추방될 것을 각오하고 세 사람의 직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두었다 하나 상소문에는 유옥의 이름이 빠져 있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김정박상 두 사람이 유옥에게 “우리들이 모두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고 있네만 자네는 형제가 없어 자네 말고는 부모를 모실 사람이 없으니 자네가 죽으면 효에 손상을 입히는 것이네”라고 하여 빠진 것이라 한다. 이후 1699년(숙종 25)에 현감 신규(申奎)신씨의 지위와 명호를 회복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에서 의견이 분분하여 시행되지 못하고 별묘를 지어 받들기만 하였다. 그 후 1740년에 다시 여러 신하가 모여 의논하고 임금이 결단하여 신씨의 호를 단경 왕후로 추상하고 태묘에 올렸으며, 능을 온능이라 하였다. 이때 두 분도 모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 주고 자손을 녹용할 것을 명하였다 한다.

[현황]
순창 삼인대는 1963년과 1977년, 1987년, 1991년에 보수되었고 주변에 철책을 세워 보호 관리하고 있다. 1973년 6월 23일에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7호로 지정되었다. 1978년에는 삼인대비의 내용을 한글로 번역, 음각하여 비각 옆에 새로운 비석을 세웠다. 1994년에 순창군 향토인과 김정 등 삼인의 후손들에 의해 삼인 문화 선양회가 구성되어 1995년부터 매년 음력 7월 그믐에 삼인 문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14년 강천사에서 순창 삼인대로 건너가는 석교(石橋)의 판석을 높이고 측구(側溝)[도로의 노면 배수를 위해 도로 끝 또는 보도와 차도의 경계에 만들어져 있는 도랑]를 설치하는 등 정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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