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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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六二五戰爭
이칭/별칭 6·25 동란,6·25 사변,한국 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의성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1950년~1953년까지 북한의 남침으로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포함한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선제 공격에 의해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1개월 동안 전개된 전쟁이다. 수백만의 인명이 희생되고 셀 수 없을 정도의 물적 기반이 파괴된 민족 간 전쟁으로, 유엔 연합군과 중국군이 참전했다는 점에서 국제전으로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전쟁의 명칭은 남한에서는 민족 간에 벌어진 전쟁이라는 점에서 전에 ‘6·25 동란’ 또는 ‘6·25 사변’으로 불렸다. 최근에는 ‘동란’ 또는 ‘사변’보다는 전쟁으로 많이 부르고 있는데, ‘6·25 전쟁’ 또는 ‘한국 전쟁’이 그것이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조선 전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의 조선은 북한이 아닌 남북한 전체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북한에서는 혁명적 관점에서 ‘조국 해방 전쟁’이라 부르고 있다.

[의성 지역에서의 전황]
전쟁 발발 당시 남북한의 전투력을 비교해 보면, 지상군의 경우 국군은 9만 6000여 명, 북한군은 19만 6000여 명이었고, 해군의 경우 국군은 7,000여 명, 북한군은 4,700여 명이었으며, 공군의 경우 국군은 1,900여 명, 북한군은 2,000여 명 정도였다. 전체 병력은 국군은 10만 5000여 명, 북한군은 20만 3000여 명 정도로서 국군은 북한군에 비해 절반 정도였다. 의성군의 경우 6·25 전쟁 발발 직후 국민 보도 연맹원에 대한 예비 검속이 시작되었고, 낙동강 전투가 전개되던 7월 하순부터 8월 초순에는 의성군의 여러 곳에서 집단 학살이 이루어졌다.

8월 1일 국군은 안동교를 폭파하면서 안동을 철수하였고, 국군 제8사단은 낙동강을 도하해 낙동강 남안에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날 안동을 점령한 인민군 제12사단은 김일성으로부터 ‘안동 사단’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8월 4일 안동에서 재편성을 마치자마자 인민군은 낙동강에 대한 도하를 시도하였다.

인민군 제12사단이 안동을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에 이르게 되자 국군은 경상북도의 왜관-의성-청송-영덕을 잇는 140㎞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의성과 접한 낙동강 방어선은 국군의 낙동강 중부 방면 작전 지역에 속했다. 북한군은 대구와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8월 대공세와 9월 대공세란 작전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8월 4일에 국군 제8사단장으로 부임한 최덕신 대령은 8월 7일 무렵 의성 지구 방어에 있어 중요 거점으로 판단되는 향로봉을 재탈환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하였다. 향로봉을 둘러싼 피아간의 전투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고, 8월 13일 제8사단장은 인민군의 공세에 부대를 의성 동남방 구산동을 경유하여 벌전(伐田)으로 옮겨 배치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로써 인민군이 의성 선에 진출하게 되었고, 국군 제8사단은 분전 끝에 중과부적으로 부득이 의성 지구를 적에게 내어주게 되었다.

의성을 점령한 인민군은 인민 위원회를 비롯한 청년 동맹, 부녀 동맹 등 지방 권력을 구성하여 토지개혁, 인민군 초모 사업 등 점령 정책을 실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낙동강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된 사정에서 점령 정책이 강력하게 실시되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에서 총반격을 개시함으로써 북한군에게 치명적인 손실을 입히면서 전세를 뒤집었다. 이에 의성 역시 다시 국군에 의해 회복되면서, 인민군의 점령 정책은 일소되었고, 국군에 의한 통치력이 회복되었다.

[의성 지역 전투의 의의]
비록 의성이 북한 인민군에게 점령되기는 했으나 의성 지구 전투는 북한이 호언장담했던 8월 15일 대구 점령을 무력화시키는 효과를 나타냈다. 안동 함락 이후 13일간의 전투가 인민군의 대구로의 남하를 저지시키는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역사적 의의]
6·25 전쟁은 3년 1개월 동안 계속되어 쌍방에서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를 내면서 한반도 전체를 초토화했지만, 결국 분단 국가 사이의 국경선인 38도선을 휴전선으로 대체시키기만 한 채 휴전되고 말았다. 또 6·25 전쟁은 한반도에서 남북간의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세계적으로는 동서 냉전을 격화시키는 큰 계기가 되었다. 결국 전쟁이 아닌 평화의 중요성이 크게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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