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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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楊士彦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양윤택
[정의]
조선 전기 포천 출신의 문신이자 문인, 서예가.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 고조할아버지는 공조 전서 양진팔(楊振八)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황해도 절도사 양치(楊治)이다. 할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郞) 양제달(楊悌達)이며, 아버지는 돈령부 주부 양희수(楊希洙)이다. 형 양사준(楊士俊), 아우 양사기(楊士奇)와 함께 중국의 삼소(三蘇)[소식(蘇軾)·소순(蘇洵)·소철(蘇轍)]에 견주어졌으며 포천의 3걸로도 불렸다. 아들 양만고(楊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활동 사항]
양사언(楊士彦)[1517~1584]은 1540년(중종 35) 진사시에 합격하고 1546년(명종 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곧바로 「운정기(雲亭記)」를 지어 명성을 떨쳤다. 이후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 현감, 평창 군수, 강릉 부사, 함흥 부윤 등을 역임하였는데 외직을 두루 지낸 것은 자연의 경관과 산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자원한 것이라 전한다. 이후 성균관 사성을 역임한 이후 다시 외직으로 나가 외양 군수가 되었다. 이때 금강산에 자주 들러 자연 경관을 즐기면서 읊은 ‘봉래 풍악 원화 동천(蓬萊楓嶽元化洞天)’이라는 글씨가 지금도 만폭동 바위에 새겨져 있다. 그 이후 철원 군수를 지내고 강릉 부사를 지냈다. 목민관 재임 시 각 지역마다 글 솜씨를 발휘하여 비문을 지었는데 그 암각문이 지금까지도 전한다. 특히 포천 영평천 변의 금수정에는 양사언과 관련한 많은 암각문이 전한다.

안변 군수 재임 시에는 지역 교육과 유학 교화에 힘쓰고 선정을 베풀어 평안 감사가 이를 상신하여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다. 당시 군민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큰 못을 파게 하고 말여물을 많이 저장하도록 지시하였는데, 얼마 후 북쪽에서 변란이 일어나 많은 군사가 북진할 때 다른 고을에서는 말여물과 물이 없어 관리나 백성이 고초를 겪었으나 안변 지역만 큰 고통 없이 전란을 이겨냈다고 한다.

그러나 뒤에 안변 서곡면 능골에 있는 지릉(智陵)[의조 능]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이에 대한 책임으로 유배되었다. 2년간 귀양살이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에 걸려 죽었다. 양사언은 40년간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 않았다. 한편 남사고(南師古)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학문과 저술]
양사언의 시는 큰 기교 없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일찍이 금강산에 드나들면서 보고 느낀 바를 적은 『금강산 유람기』가 대표적이다. 또한 명필로도 유명했는데, 특히 초서를 잘 썼다. 안평 대군(安平大君), 김구(金九), 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불렸다. 저서로 『봉래집(蓬萊集)』이 있고, 유묵으로 「미인별곡(美人別曲)」이 있는데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 금수정 강변에 ‘경도(瓊島)’ 등을 새긴 암각문이 있으며, 장인인 금옹(琴翁) 김윤복에게 보내는 「증금옹 시(贈琴翁詩)」가 전한다. 자작동의 ‘유인선 효우 비(柳仁善孝友碑)’ 후면에 양사언이 짓고 쓴 「효우전(孝友傳)」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가사로 남정군(南征軍)에 종군하고 읊은 「남정가(南征歌)」가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산193번지에 있다. 1986년 4월 9일 포천시 향토 유적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산175-1번지에 자리한 길명사에서 양사언을 배향하고 있다. 길명사는 2006년 4월 6일 포천시 향토 유적 제45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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