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꿈은 이루어진다. 문학 경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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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618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주희
[새 역사의 시작]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매소홀로 618[문학동 482]에 있는 문학 경기장은 ‘한국 축구 16강 성지’이다. 한국 축구의 월드컵 도전 역사 48년 만에 그토록 바라던 16강 진출의 꿈을 이룬 곳이다.

청동기 유적이 발견돼 지금의 인천광역시가 비류 백제의 도읍지인 미추홀임을 증명한 곳. 한때 인천 시민 구단인 프로 축구 인천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이자, 인천에 연고지를 둔 프로 야구 SK 와이번스의 둥지. 그 문학 경기장에서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처음으로 나선 이래 20세기 내내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던 한국 축구가 2002년 6월 14일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꿈이 이루어졌다]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그토록 바랐으나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일이 2002년 여름 문학 경기장에서 벌어졌다.

2002년 6월 14일 한일 월드컵 조별 예선 D조 마지막 경기. 1차전에서 폴란드를 2 대 0 완승으로 누르고, 2차전에서 미국과 1 대 1 무승부를 기록하며 1승 1무로 조 선두를 달리던 대한민국은 같은 조에서 가장 까다로운 상대로 꼽히던 포르투갈과 문학 경기장에서 만났다.

이때까지도 대한민국 축구는 월드컵 16강 진출에 목말랐다. 지역 예선에서 일본을 꺾은 한국 축구가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 무대에 진출한 1954년 스위스 월드컵. 6·25 전쟁 직후라 경제적 여건도 어려운데다 여행사의 실수로 한국 축구 국가 대표 팀은 이틀하고도 반나절을 여행한 끝에 경기 전날 겨우 스위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헝가리와 치른 월드컵 첫 경기에서 0 대 9로 대패하고, 이어진 터키 전에서 0 대 7로 크게 져 대회 규정에 따라 독일과의 경기는 치르지 못한 채 귀국길에 오르는 수모를 겪었다. 세계 축구의 벽은 전쟁을 치른 가난한 나라 한국에게는 넘을 수 없는 너무나도 높은 벽이었다.

그로부터 32년 만에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 한국 축구는 아르헨티나 전에서 비록 패했지만 월드컵 사상 첫 골을 기록했다. 불가리아 전에서 1 대 1 무승부를 기록하며 첫 승점까지 획득했지만 16강 진출은 역시나 요원했다.

이후 1998년 프랑스 월드컵까지 4회 연속 진출이란 쾌거를 올렸어도 매번 16강 진출에 필요한 경우의 수만 따지는 일을 반복했다. 희망은 컸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이 돼 갔다.

그렇게 맞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앞선 두 경기서 1승 1무를 기록하며 조 선두를 달리고 있었지만 한국 축구는 또 경우의 수를 따져야 했다. 한국과 미국이 각각 승점 4점을, 포르투갈이 3점을 획득한 상황. 자칫 한국이 포르투갈에 패하면 미국과 폴란드의 경기 결과에 따라 16강 진출은 또다시 4년 뒤로 미뤄진다.

두 나라 모두 16강 진출 명암이 걸린 경기라 포르투갈 선수 2명이 퇴장당할 정도로 경기는 치열했다. 힘겨웠던 경기는 후반 25분 박지성의 발끝에서 매듭지어졌다. 1 대 0 신승(辛勝). 수용 인원 50,256석을 가득 채운 문학 경기장은 붉은 물결로 출렁였고, ‘한국 축구 16강 성지’가 됐다.

한국 축구는 미친 듯 경기력을 펼치며 16강[이탈리아 전 2 대 1]과 8강[스페인 전 승부차기 승]을 넘어 4강에 안착했다.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가 들썩거렸다. 문학 경기장에서 시작한 신화는 그렇게 현실이 됐다.

[숭의동 시대를 마감하고]
문학 경기장은 당초 2002 한일 월드컵과는 무관하게 건립이 추진됐다. 인천광역시는 1964년 건립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숭의동의 시립 운동장 시설이 노후하고 규모가 협소해 전국 대회 유치에도 어려움이 있자 새로운 종합 운동장 건립을 추진한다.

인천 공설 운동장이라고 했던 시립 운동장은 일제 강점기인 1934년 숭의동에 건립되었다. 이 전까지 인천의 공설 운동장은 자유 공원 아래 지금의 제물포 고등학교가 있는 ‘웃터골’로 1920년에 개설된 것이다. 여기서 야구 대회가 열릴 때면 변변한 좌석도 없는 산자락에 인천 사람들이 모두 모여 열띤 응원전을 펼쳤다. 조선과 일본 청년들의 야구 경기가 열릴라치면 그 열기는 더 뜨거웠다.

웃터골에 인천 중학교가 들어서고, 공설 운동장으로서 기능을 잃자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에 전체 51,570여㎡ 규모에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공설 운동장을 세우게 되었다. 이어 1936년 5,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야구장과 400m 트랙과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육상 경기장이 건립됐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해방, 6·25 전쟁을 거치면서 그나마 있던 공설 운동장은 제 노릇을 하지 못한 채 밭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군부대 자리가 되기도 했다. 휴전 후 한미 친선 위원회가 공설 운동장 복구에 나서 종합 운동장으로서 면모를 갖추게 된다. 특히 1964년 제45회 전국 체전을 인천이 개최하면서 대대적인 시설 보수에 나서 3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전국 최대 규모의 종합 운동장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어 3차례 더 전국 체전을 개최했지만 세월의 흐름을 비껴갈 수 없었고, 좁고 낡은 시설 탓에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정식 경기는 고사하고 보조 경기장으로도 활용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인천직할시는 1990년 2월 16일 7개년 계획으로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문학동 일원에 육상 경기장과 야구장, 실내 수영장, 실내 체육관, 다목적 운동장 등을 갖춘 298,930㎡ 규모의 종합 경기장 건립 계획을 수립하고, 1994년 7월 14일 착공하기에 이른다.

공사를 진행하던 중 1996년 5월 31일 2002 한일 월드컵 개최가 확정되자 월드컵에 대비해 설계 변경이 이뤄졌다. 각계의 의견을 종합해 우선 종합 경기장의 부지 규모를 441,628㎡로 대폭 확장하고, 실내 수영장과 체육관은 2002년 이후로 계획하는 등 월드컵 관련 시설을 우선 건립하는 것으로 방향을 설정하였다. 이어 1997년 12월 29일 인천광역시가 월드컵 개최 도시로 확정됐고, 2001년 12월 준공하기에 이른다.

경기장 준공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2000년 5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 인하 대학교 박물관문학 경기장 부지에 대한 문화재 발굴 조사를 벌였다. 인하 대학교 박물관이 1년 전에 실시한 문학산 일대 지표 조사에서 백제 시대의 것으로 판단되는 두드림무늬 토기[打擦文土器]를 발견되어, 관련 유적의 존재가 제기됐고 이에 따라 시굴 조사가 실시된 것이다. 현 인천 치하철 문학경기장역에서 월드컵 주 경기장으로 들어서는 진입로 구간에 대한 시굴 조사 결과, 청동기 시대의 고랑 모양 유적인 구상 유구(溝狀遺構) 1기와 근대 민묘(民墓) 여러 기가 확인됐다. 유구의 범위와 성격 파악을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어 조사 지역에 대한 전면 발굴을 시행하게 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구상 유구 1기, 타원형 수혈 유구 1기, 근대 민묘 11기가 확인됐지만, 더 이상 발굴은 확대되지 않고 멈췄다. 월드컵 개최란 명분이 더 이상의 발굴 조사를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어찌됐든 숭의동 시립 운동장 시대를 마감하고 들어선 문학 경기장은 대한민국 축구의 ‘월드컵 16강 진출’이란 꿈을 이룬 성지가 됐다. 게다가 2002 월드컵 3위를 차지한 터키가 문학 경기장에서 6월 9일 치른 코스타리카 전을 무승부로 마감한 덕에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고, 6월 11일 우승 후보 프랑스가 덴마크에 0 대 2로 패배하며 3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쓸쓸히 귀국길에 올랐던 곳도 문학 경기장이었다. 문학 경기장은 한국은 물론 세계 축구의 새로운 역사를 쓴 곳인 것이다.

[‘비룡’ 문학산 둥지에서 하늘을 날다]
웃터골은 조선의 청년들이 뜨거운 열정으로 일본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비록 편파 판정에 울분을 삭히기도 했지만 식민지 조선인들이 말 못할 한을 풀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웃터골에서 기개를 펼쳤던 한용단(漢勇團)[국내 야구 역사상 최초로 순수 한국 사람으로만 구성되었던 야구단]의 맥은 도원 야구장으로 이어졌다. 1950년대 “인천하면 야구요 야구하면 인천.”이란 말이 회자됐다. 한국에 야구가 들어온 곳이 인천이고, 야구를 잘하는 도시였기에 인천을 표현할 때면 꼭 ‘구도(球都)’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구도 인천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도원 야구장은 합법적으로 증축과 개축이 어려운 무허가 건물이었다. 그래도 만년 꼴지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인천 프로 야구팀 최초로 한국 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안겨 준 현대 유니콘스까지, 인천 야구팬은 초라하긴 했지만 도원 야구장에서 어느 지역 야구팬보다 열성적으로 목청껏 인천 팀을 응원했다.

그러하기에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지 이전은 충격이었다.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 선수단이 주축이 돼 2000년 탄생한 SK 와이번스가 인천 연고 팀이 됐을 때, 메이저리그 야구장에 버금가는 문학 야구장은 한동안 텅 빌 수밖에 없었다.

문학 야구장은 한국 프로 야구 8개 팀의 홈구장 중 가장 현대식 시설을 자랑한다. 설계 당시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다저스 스타디움을 본 따 만들었다는 문학 경기장은 대한민국 야구장 중 최초로 외야에 투수 불펜을 설치했다. 2009년에는 외야석 일부를 떼어내고 바비큐 존을 들였고, 좌익수 뒤편 외야는 좌석을 아예 없애 잔디 언덕에서 야구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문학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SK 와이번스는,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지 이전을 겪으며 떠나간 인천 팬들의 마음을 잡는 데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조범현 감독 체제로 치른 2003년 창단 후 처음으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SK 와이번스는 2005년 준 플레이오프까지 나선다. 그리고 김성근 감독이 지휘봉을 넘겨받은 2007년 SK 와이번스는 한국 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인천 팬에게 안겼다. 이후 SK 와이번스는 6년 연속 한국 시리즈 진출이란 대업을 달성한다. 인천 팬들의 마음도 돌아섰다. 2007년 인천 연고 팀 최초로 60만 관중 시대를 열더니, 2012년 100만 관중 시대를 열며 문학 야구장에서 ‘구도 인천’의 명성을 다시 이어가고 있다.

[다시 숭의동 시대를 열고]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후 문학 경기장 활용 방안이 화두로 떠올랐다. 큰돈을 들여 세운 경기장을 마냥 비워둘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인천광역시는 여러 실업 팀을 유치하려고 접촉했으나 실패했고, 프로 축구단 창단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인천광역시는 가칭 ‘인천 시민 프로 축구단’ 창단을 위해서 초기 자금 150억 원을 책정하고 월드컵을 치르고 남은 자금 30억 원과 기업 자금을 유치하는 한편, 시민주 공모를 통해서 자금을 모았다. 구단 명칭을 인천 유나이티드로 확정하고 최태욱을 영입하는 한편, 독일 출신 베르너 로란트 감독을 선임했다.

2004년 3월 1일 팀이 창단됐고, 그해 K리그 첫 시즌에 참가했다. 하지만 성적은 전기 리그 13위. 더군다나 로란트 감독이 8월 부인의 건강 악화로 사임하면서, 장외룡 수석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신화가 시작된다. 창단 2년째인 2005년. 모기업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시민 구단 인천 유나이티드는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최태욱을 J 리그 시미즈 에스펄스로 이적시킨다. 그렇게 얻은 15억 원을 운영 자금으로 사용했지만 가난한 구단의 선수층은 얇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 리그를 7승 3무 2패 2위로 마감한 뒤, 후기 리그에서는 6승 3무 3패로 5위를 기록해, 통합 성적 13승 6무 5패로 창단 2년 만에 우승을 기록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챔피언 결정전에서 울산 현대에 통합 점수 3 대 6으로 패하며 리그 준우승에 머물고 만다. 시민 구단의 돌풍은 다큐멘터리 영화 「비상」에 고스란히 담겼다.

K리그 최초로 감독을 1년간 영국에 보내 선진 축구를 배우도록 했고, 인천 유나이티드의 서포터즈들은 K리그 최초의 길거리 응원전을 펼쳐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성적은 하위권. 장외룡 감독을 이은 일리야 페트코비치 감독이 아내의 건강 악화를 이유로 인천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페트코비치 감독이 한 달 뒤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아홀리 감독으로 취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잦은 감독 교체와 구단 운영을 위한 선수 판매 행위가 도마에 올랐다.

그래도 구단은 흑자 경영을 이어갔고, K리그 최초로 코스닥 상장을 목표로 삼았다. 여전히 하위권인 상황을 벗어나고자 2010년 8월 22일 국가 대표 감독을 지낸 허정무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그래도 성적은 나아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단은 재정난에 봉착한데다, 사장 선임 문제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김남일, 설기현 등 2002년 월드컵 주역을 영입한 2012년 인천 유나이티드문학 경기장에서 숭의동 인천 축구 전용 경기장으로 둥지를 옮겼다. 인천 축구 전용 경기장은 2008년 시립 운동장을 헐고 그 자리에 21,000석 규모로 들어섰다. K리그 16개 구단 중 10번째로 전용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인천 유나이티드숭의동 인천 축구 전용 경기장 시대를 맞으며 문학 경기장의 이루지 못한 ‘비상’을 다시 한 번 꿈꾸고 있다.

    [참고문헌]

    [지식연계]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8.04 [새 역사의 시작] 비문 수정 한국 축구가 새로운 역사를 2002년 6월 14일 썼다. -> 한국 축구가 2002년 6월 14일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
    2014.05.08 태깅 및 지식연계 수정 1.'인천 월드컵 경기장' 항목명을 '인천 문학 경기장'으로 변경함에 따라 태깅도 수정
    2. 지식연계 수정
    <변경 전> 문학 경기장(http://www.insiseol.or.kr/institution_guidance/munhak/index.asp)
    <변경 후> SK와이번스 문학경기장(http://www.sksports.net/Wyverns/Munh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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