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표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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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漂流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승희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653년 7월연표보기 - 하멜 등이 표류하여 켈파르트 섬의 해변[모슬포항 혹은 강정 인근]에 상륙
    성격 표류 사건
    관련 인물/단체 하멜
[정의]
1653년 제주 서귀포 지역에 네덜란드 사람 하멜 일행이 표착한 사건.

[개설]
핸드릭 하멜(Hamel, Hendrick)은 1630년에 네덜란드의 호르쿰에서 태어났다. 그는 1650년 11월 6일에 보겔주트뤼즈호를 타고 네덜란드를 떠나 바타비아로 향했다. 바타비아에서 그는 VOC 선박의 포수이자 서기로 일하였고, 1653년 7월에 상선 스페르베르호를 타고 바타비아를 떠나 일본의 나가사키로 향했다. 그 당시 나가사키는 일본과 네덜란드가 교역하던 유일한 창구였고, 에도시대에 네덜란드에서 전해진 학문을 연구하였던 난학(蘭學)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순조롭게 항해를 하던 스페르베르호는 태풍을 만나 난파되었고, 하멜을 포함한 36명의 생존자들은 켈파르트 섬의 해변에 상륙하였다.

이후 하멜은 고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가 1668년에 『1653년 바타비아발 일본행 스페르베르호의 불행한 항해일지』를 써서 발표했다. 원래 목적은 조선에 억류되어 있던 13년의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서 글을 썼지만, 출판사를 통해 발표되면서 이 글은 동양의 작은 나라인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호기심으로 인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역사적 배경]
표류(漂流)는 제주인들이 다른 지역에 표착한 경우이며, 표도(漂到)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제주에 표착한 사례를 의미한다. 사면의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야 했던 제주인들은 뜻하지 않은 바람을 만나, 다른 지역으로 표류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제주는 지정학적으로 동북아시아의 해상 중심에 위치한 섬이었기 때문에 제주도 인근을 항해하는 선박들은 해발 1,950m의 한라산을 항해의 이정표로 삼아 동중국 해상을 자유롭게 왕래하였다.

그러나 제주 부근을 항해하던 선박이 뜻하지 않은 바람을 만나거나 파도가 덮쳐 제주에 표도하는 경우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 가운데 이국인이 제주에 표착, 즉 표도한 예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제주 주위의 중국, 일본유구[오키나와] 주민뿐만 아니라 서양인이 제주에 표류하는 경우였는데 제주가 서양과의 접촉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네덜란드 선박이 제주에 표착하면서부터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17세기 중엽부터 영국을 따돌리며 동양무역의 독점적인 위치를 확보하여 나갔는데, 동양무역을 담당했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정부로부터 동양의 여러 나라와의 조약 체결 등의 권한까지 부여받은 상황이었다. 이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1641년 일본나가사키에 상관(商館)을 설치하여 1845년까지 일본과 유일하게 교역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제주와 서양과의 첫 만남은 1627년(인조 5년) 네덜란드의 벨테브레(J.J.Weltevree) 등에 의해 이루어졌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에 소속된 선박에서 근무하던 그는 1627년 우베르케르크(Quwerkerck)호를 타고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제주도에 상륙하였다가 조선 관헌에게 붙잡혀 1628년 서울로 압송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벨테브레는 조선인으로 귀화하여 이름을 박연이라 짓고, 조선인 여자와 혼인하여 남매를 두었는데, 그는 조선에 귀화한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이후 1653년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하였을 때, 박연이 통역관으로 제주에 내려와 하멜 일행과 대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과]
1653년(효종 4년) 이원진 목사 당시, 하멜 일행이 승선한 스페르웨르호 선박이 제주에 표착하였다. 제주 목사 이익태의 『지영록(知瀛錄)』 「서양국표인기(西洋國漂人記)」에 따르면, 이들 하멜 일행의 표착 후의 상황을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

첫째 표는 상황 및 문정 결과 보고에 대한 것이다. 1653년(효종 4년) 7월 24일 힌듥얌신(핸드릭 양세) 등 하멜 일행 64명이 탄 배가 대정현 즉, 차귀진 관할의 대야수 연변에 표착했는데, 승선자 중에 익사자 26명, 병사자 2명, 생존자는 36명이었다. 중국어, 일본어 통역관 및 유구어를 하는 사람과 대질했으나 말이 통하지 않자, 조정에서 남만표래인(南蠻漂來人) 박연을 제주에 파견하여 문정(問情)하였다고 한다.

둘째 박연이 표류자들을 문정한 결과, 모두 남만(南蠻)[네덜란드] 사람들이었고, 그 중에는 박연의 고향 인근에 살고 있었던 나이 13살의 너넷고불신이 포함되어 있어서, 박연은 가족의 근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연이 네덜란드를 떠나던 때와 의복제도가 달라져 있었음도 확인하였다. 또 표류 선박은 무역선으로 사탕, 후추, 목향(木香) 등의 물건으로 대만에 가서 녹피(鹿皮)를 사다가 중원(中原)에 가서 팔고, 목향으로 왜화(倭貨)를 사려고 일본으로 가다가 표류하였다. 표류자들은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주면 본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하였으나, 박연은 자신과 함께 한성으로 올라가 훈련도감의 포수로 입속하자고 제의한 내용이 담겨있다.

셋째 이들 하멜 일행의 언어습관, 피부색, 머리 모양, 수염, 키, 모자 등이 언급되어 있으며, 일등 항해사였던 힌듥얀신이 기타공(技舵工)으로 천문을 재고 방위를 분간한다는 내용이 수록되었다.

넷째 박연이 표류자를 인솔하고 본토[조선 내륙]로 들어가 호남 병영과 수영에 분속시킨 내용과 그들이 소유했던 병기 등의 물건은 제주목 무기고에 남겨두었다는 내용이다. 박연은 계속 제주에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문정 후에 서울로 상경했다가 하멜 일행을 서울로 이송하기 위하여 다시 제주에 파견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위 기록을 통해 하멜 일행의 사망자 28명 중에 2명은 표류 전에 이미 병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그간 설왕설래 해왔던 하멜표착지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致敗于大靜縣地 方遮歸鎭下大也水沿邊’이라 한 바와 같이, 대정현에 소속된 차귀진 관하(管下)의 대야수( 大也水)라 부르는 곳의 해안가가 바로 하멜 일행이 표착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이 자료에는 하멜 일행이 표착한 지역을 대정현(大靜縣)차귀진(遮歸鎭)대야수 연변(大也水 沿邊)으로 다른 자료에 비해서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지금의 서귀포시 사계리 용머리 해안 부근에는 하멜의 표도를 기념하기 위한 하멜기념비와 하멜전시관이 세워져있다.

그러나 현재 학계에서는 위의 사료 등을 근거로 하여, 17세기 당시 하멜의 표착지라고 흔히 알려진 사계리 용머리 해안은 정확한 표착 위치가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고증에 따른 위치를 새롭게 지정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현재 하멜표착지로 거론되는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 2리 해안을 비롯하여 중문과 모슬포, 강정, 고산리 해안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1653년(효종 4년) 음력 7월 24일 힌듥얌신[핸드릭 양세] 등 하멜 일행 64명이 탄 배가 대정현 즉, 차귀진 관할의 대야수 연변에 표착하였는데 승선자 중에 익사자 26명, 병사자 2명, 생존자는 36명이었다. 이들이 승선한 스페르웨르호는 동인도회사의 무역선으로 사탕, 후추, 목향(木香) 등의 물건으로 대만에서 녹피를 사다가 중국에 되팔고, 목향으로 왜화(倭貨)를 사려고 일본나가사키를 향해 항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대정현차귀진 앞바다의 큰 여(礖)에 부딪혀 좌초되었던 것이다.

하멜 일행은 제주목사 이원진의 심문을 받고 이듬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에 편입되었으며,1656년(효종 7년) 강진의 전라병영, 1663년(현종 4년) 여수의 전라좌수영에 배치되어 잡역에 종사하다가 1666년(현종 7년) 9월 하멜은 7명의 동료와 함께 탈출 하여 일본을 경유, 1668년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하멜은 그해에 표류 당시 소속되었던 동인도회사에 조선에 억류되었던 동안에 받을 임금을 청구하기 위하여 『난선제주도난파기(蘭船濟州島難破記)』 및 부록 「조선국기」 즉, 『하멜 표류기』로 알려진 기행문을 제출하였다. 이는 하멜의 조선 억류생활 약 14년간의 기록으로 한국의 지리, 풍속, 정치, 군사, 교육, 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문헌이었다.

[의의와 평가]
하멜의 제주 표도는 제주와 서양 또는 제주를 매개로 조선과 서양이 만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상징적인 의미가 매우 크다. 특히 『하멜 표류기』는 서양인들에게 미지의 세계로 알려진 조선을 비롯한 제주를 서양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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