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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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尹致昊
이칭/별칭 좌옹(佐翁)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천안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정내수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5년(고종 2)연표보기 - 윤치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81년 - 윤치호 신사 유람단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일본 시찰
    활동 시기/일시 1883년 - 윤치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85년 - 윤치호 상해로 망명 후 미국 유학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윤치호 귀국 후 외부협판과 학부협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898년 8월 - 윤치호 독립 협회 2대 회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03년 7월 - 윤치호 천안 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윤치호 대한 자강회 회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12년 - 윤치호 ‘105인 사건’ 주모자로 검거되어 투옥
    활동 시기/일시 1937년 - 윤치호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상무 이사·국민 총력 조선 연맹 이사로 친일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윤치호 조선 임전 보국단 고문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윤치호 귀족원 의원 역임
    몰년 시기/일시 1945년연표보기 - 윤치호 사망
    성격 관료|정치인|사회 운동가
    성별
    본관 해평
    대표 관직 『독립신문』 사장|대한 자강회 회장|흥업 구락부 회장|국민 총력 조선 연맹 이사
[정의]
개항기 천안 군수를 역임한 관료·정치인·사회 운동가.

[개설]
윤치호(尹致昊)[1865~1945]는 한말 개화파로 1898년 독립 협회 회장, 1903년 천안 군수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1920년 이후에는 친일 활동을 펼쳤다.

[가계]
본관은 해평(海平), 호는 좌옹(佐翁)이다. 할아버지는 윤취동(尹取東), 아버지는 무관 출신으로 충청감영 중군(忠淸監營中軍)을 지낸 윤웅렬(尹雄烈)이다. 어머니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이다.

[활동 사항]
1881년 신사 유람단의 어윤중(魚允中)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1883년 4월까지 일본에 머물렀다.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고,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 인물과 일본 개화의 선구자 후쿠자와[福澤諭吉]·나카무라[中村正直] 등과 교류하였다.

1883년 초대 주한 미국 공사 푸트(Foote. L. H.)의 통역으로 귀국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가 되었고, 고종과 푸트와 개화당 간의 교량 역할을 하면서 조선의 자주권 확립과 정치 개혁에 힘썼다.

1884년 12월의 갑신정변에는 가담하지 않았으나 정변의 주역인 김옥균·박영효 등과 친밀했기 때문에 정변 실패 후 신변의 위협을 느껴 1885년 1월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중서 서원(中西書院)에 입학하여 3년 6개월 동안 체계적인 근대 교육을 받았다. 중서 서원을 수료한 뒤 감리교회의 후원으로 미국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 신학과 영어 코스를 졸업하였고, 에모리(Emory) 대학에서 인문 사회 과학과 자연 과학을 수강하였다.

윤치호는 일본 유학 기간에는 메이지 유신의 근대화 과정과 자유 민권 운동을 체험하였고, 중국 유학 기간에는 중국과 조선의 낙후된 전통 사회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갖고 기독교의 세례 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미국 유학 기간에는 민주주의와 과학 문명에 기초한 성숙한 근대 사회를 체험하였다. 이와 같은 체험을 바탕으로 조국을 전통 사회로부터 근대 사회로 전환시키려는 강력한 근대 변혁 사상을 갖게 되었다.

189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상해를 거쳐 귀국한 뒤 외부협판과 학부협판 등을 지냈고, 1896년에는 민영환(閔泳煥)의 수행원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1897년 후반부터 독립 협회에 가담하여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 협회 운동을 이끌었으며, 서재필이 추방당한 뒤 1898년 8월 제2대 회장이 되어 그해 10월에 1만여 명이 참석한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대외적인 자주 국권의 수호와 대내적인 자유 민권의 보장 및 근대적인 자강 체제의 수립을 포괄하는 ‘헌의 6조(獻議六條)’를 결의하였다. 또한 『독립신문』 사장과 만민 공동회 회장을 맡아 자주 국권 운동과 자유 민권 운동 및 자강 개혁 운동을 통한 자주적 근대화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뒤 정부의 탄압으로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의 자주 민권 운동이 좌절되었다.

민중 운동가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은신하던 중, 1899년 덕원 감리 겸 덕원 부윤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1900년 6월 삼화 감리 겸 삼화 부윤, 1901년 7월에는 다시 덕원 감리 겸 덕원 부윤에 복귀하였다. 1903년 7월 천안 군수, 1904년 2월 무안 감리로 발령받았다가 부임 3개월 전 외부협판에 임명되었다. 천안 군수 시절의 활동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 잘 알 수 없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한 뒤 1906년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대한 자강회를 조직하였고, 회장으로 추대되어 국민의 자주 자강 정신과 능력을 기르는 데 힘썼다.

그 뒤 개성에 한영 서원(韓英書院)을 설립하여 원장을 맡았고, 안창호(安昌浩) 등이 주도한 신민회의 교육 기관인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으로 신교육 구국 운동에 진력하였다. 한편, 대한 기독교 청년회 연맹(YMCA)의 이사와 부회장 및 세계 주일학교 한국 지회의 회장에 선임되어 청소년 계몽 운동을 통한 기독교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1912년에 일제가 민족 지도자를 말살하기 위해 날조한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어 3년간 수감 생활을 겪고 1915년에 석방되었다.

출옥 후 YMCA의 총무와 회장으로 활동했고, 연희 전문학교·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이화 여자 전문학교 이사와 송도 고등 보통학교와 연희 전문학교의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조선 체육회 회장과 민족 운동 단체인 흥업 구락부(興業俱樂部)의 회장에 선임되어 신교육 운동과 기독교 운동을 중심으로 국권 회복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1920년부터 교풍회(矯風會), 각도 조선인 대표자 대회, 조선인 산업 대회 등 일제의 통치 정책에 이용된 친일 단체와 모임에 깊이 관여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을 전후하여 일제의 전시 체제가 더욱 강화되자,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 연맹 상무 이사와 국민 총력 조선 연맹 이사로 친일 활동을 하였다. 1941년 친일 세력을 총망라한 조선 임전 보국단의 고문과 1945년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우스운 소리』와 『영어 문법 첩경』이 있고, 역서로 『찬미가』·『의회 통화 규칙』·『이솝 우화』·『걸리버 여행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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