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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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金宗直
영어음역 Gim Jongjik
이칭/별칭 계온(季昷),효관(孝盥),점필재(佔畢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남정원

    [상세정보]

    출생 1431년연표보기
    활동 1453년연표보기
    활동 1459년연표보기
    활동 1464년연표보기
    활동 1465년연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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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1483년연표보기
    활동 1489년연표보기
    몰년 1492년연표보기
    추모 1689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남도 밀양시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김천시 문당동
    묘소|단소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
    사당|배향지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 예림서원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 예림서원
    사당|배향지 경상남도 함양군 백연서원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금송리 경렴서원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초곡리 덕림서원
    성격 문신
    본관 선산(善山)
    성별
    대표 관직 지중추부사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지역에 우거한 문신.

[가계]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계온(季昷)·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아버지는 성균사예(成均司藝)를 지낸 김숙자(金叔滋)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로 사재감정(司宰監正) 박홍신(朴弘信)의 딸이다. 김종직의 가문은 고려 말 선산의 토성이족(土姓吏族)에서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아버지 대에 이르러 박홍신 가문과 혼인하면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중앙 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활동 사항]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1453년(단종 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459년(세조 5)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어서 저작·박사·승문원교검·감찰 등을 두루 지내면서 왕명에 따라 「세자빈한씨애책문(世子嬪韓氏哀冊文)」과 「인수왕후봉숭왕책문(仁壽王后封崇王冊文)」 등을 지었다.

1464년(세조 10) 왕이 천문·지리·음양·율려(律呂)·의약·복서(卜筮) 등 잡학에 뜻을 두고 있는 것을 비판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경상도병마평사(慶尙道兵馬評事)로 기용되면서 관인(官人)으로서 본격적인 벼슬 생활을 시작하였다. 1467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이듬해 이조좌랑, 1469년(예종 1) 전교서교리로 벼슬이 올라갔다. 1470년(성종 1) 예문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藝文館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과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늙은 어머니를 모신다고 하여 외직으로 나가 함양군수가 되었다.

1471년 봉열대부(奉列大夫)·봉정대부(奉正大夫), 1473년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으며, 1475년에는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거쳐 함양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잠시 지승문원사를 맡았으나 다시 선산부사로 자청해 나갔다. 함양과 선산 두 임지에서 근무하는 동안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관혼상제를 시행하도록 하고, 봄가을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양노례(養老禮)를 실시하는 등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수립하는 데 주력하였다.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이승언(李承彦)·홍유손(洪裕孫)·김일손(金馹孫) 등 여러 제자들을 기른 것도 이때의 일이다.

1482년(성종 13) 왕의 특명으로 홍문관응교지제교 겸 경연시강관(弘文館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과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며,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승정원동부승지·승정원우부승지·승정원좌부승지·승정원도승지 등 승정원의 여러 벼슬에 올랐다. 이어서 이조참판·홍문관제학·예문관제학과 경기도관찰사 겸 개성유수,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 병조참판 등을 두루 지냈다. 1489년(성종 20)에는 공조참판·형조판서에 이어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나, 병으로 물러나기를 청하고 고향 밀양에 돌아가 후학들에게 경전을 가르쳤다.

[학문과 저술]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김숙자에게 수학하였다. 문장과 사학(史學)에 두루 능하였으며, 절의를 중요시하여 조선 시대 도학(道學)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면서 사림의 조종(祖宗)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특히 1486년(성종 17) 신종호(申從濩)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차(編次)한 사실만 보더라도 문장가로서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무오사화 때 많은 저술이 소실되어 진정한 학문적 모습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후일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서 사초(史草)에 수록하면서 무오사화의 단서가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 의제(義帝)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깊은 역사적 식견과 절의를 중요시하는 도학자로서의 참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정몽주길재 및 아버지로부터 전수한 도학 사상은 그의 제자인 김굉필·정여창·김일손·유호인(兪好仁)·남효온(南孝溫)·조위(曺偉)·이맹전(李孟專)·이종준(李宗準)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김종직의 도학을 정통으로 이어받은 김굉필조광조(趙光祖)와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시키면서 학통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처럼 김종직의 도학이 조선조 도통(道統)의 정맥으로 이어진 것은 「조의제문」에서도 나타나듯, 그가 추구하는 바가 화려한 시문이나 부(賦)·송(誦) 등의 문장보다는 궁극적으로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적 성격을 지녔기 때문으로 보인다. 세조성종 대에 걸쳐 벼슬을 하면서 항상 정의와 의리를 숭상하고 실천하였는데 이 같은 정신이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실제로 이들은 절의를 높이며 의리를 중히 여기는 데 힘썼다. 이러한 연유로 자연히 사림 학자들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고, 당시 학자들의 정신적인 영수가 되었다.

사림들이 당시 훈척(勳戚) 계열에 의하여 빚어지는 비리와 비도(非道)를 비판하고 나서자, 이에 당황한 훈척 계열인 유자광(柳子光)·정문형(鄭文炯)·한치례(韓致禮)·이극돈(李克墩) 등이 자신들의 방호를 위해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많은 사림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고, 생전에 써 둔 「조의제문」으로 빚어진 일이라 하여 김종직도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였다. 저서로는 『점필재집(佔畢齋集)』·『유두류록(遊頭流錄)』·『청구풍아(靑丘風雅)』·『당후일기(堂後日記)』 등이 있으며, 편저로 『일선지(一善誌)』·『이존록(彛尊錄)』·『동국여지승람』 등이 전한다. 하지만 많은 저술이 무오사화 때 소실되어 지금 전하는 것은 많지 않다.

[묘소]
김종직이 부관참시를 당하기 전에는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마산리 무량원마을에 묘소가 있었으나, 현재는 김종직의 생가인 추원재(追遠齋)가 위치한 부북면 제대리 한골마을에 이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중종이 즉위한 뒤 죄가 풀리고 관작이 회복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는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의 건의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후사포리에 있는 예림서원(藝林書院),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에 있는 금오서원(金烏書院), 경상남도 함양군에 있던 백연서원(柏淵書院), 경상북도 김천시 감천면 금송리에 있던 경렴서원(景濂書院), 남면 초곡리에 있던 덕림서원(德林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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