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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歷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집필자 김낙진, 박상일
[정의]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충청북도 진천 지역의 역사.

[개설]
진천은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요충지로 여겨져 왔다. 백제는 일찍이 한성시대에 진천을 자신의 세력권에 넣었으며, 백제의 세력이 쇠퇴하고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추진하면서 남방진출의 교두보로서 진천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으며, 신라 역시 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진천을 장악하였다.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와 고려의 세력이 부딪치는 접경 지역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왕건궁예를 몰아내고 즉위하자 청주 지역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때 반란을 진압하는 군사적 거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려 성종 때에는 전국에 12목이 설치되자 진천은 청주목 관하에 편성되었으며, 현종 때 5도 양계로 전국의 지방제도가 일단락되자 양광도에 편입되었다. 무인정권말기에 진천 출신 임연(林衍)[ ?~1270]이 최고의 집정자가 되자 창의현(彰義縣)의령군(義寧郡)으로 읍호가 승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진주(鎭州)의 명칭이 진천으로 바뀌면서 현감이 파견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국가의 위기 앞에서 현감이 직접 나서 주민들을 이끌고 외적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영조 때에는 이인좌(李麟佐)[ ?~1728]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진천 출신 영장 남연년(南延年)[1653~1728] 등은 반란군에 끝내 항복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는 등 충절을 지켰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진천은 안성과 이천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충주의 일본군을 공격하는 등 반외세 배격의 선봉에 서기도 하였다.

[선사시대]
진천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을 끼고 넓은 구릉지가 형성된 지리적 특성에 따라 일찍이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 진천 지역에서 정식으로 발굴된 구석기시대 유적으로는 진천 장관리 유적송두리 유적이 있다. 이들 지역에서 구석기 유물이 수습되는 것으로 보아 매우 넓은 지역에 구석기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신석기 유적은 아직까지 정식으로 조사된 예가 없다. 다만 초평면 연담리에서 빗살무늬토기편이 수습되어 차후 신석기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적인 고인돌은 진천읍 성석리·원덕리, 문백면 평산리, 이월면 노원리 논실, 초평면 용정리 생곡, 초평면 용산리 일대, 초평면 용기리 방축마을 등에서 확인되었다. 민무늬토기를 비롯한 유물 산포지로는 진천읍 문봉리 용소매기, 덕산면 구산리·화산리, 만승면 실원리, 문백면 평산리, 이월면 동성리, 이월면 동성리 자매·노원리 논실·송림리 독지미, 초평면 용정리 생곡·진암리 구정벼루 등이 확인되어 일대에 취락 유적이 분포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진천 사양리 유적이월면 신월리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발굴된 바 있다.

[삼국시대]
진천군은 삼국시대인 고구려 때 금물노군(今勿奴郡)이라고 불린 뒤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만노(萬弩), 수지(首知), 신지(新知), 흑양(黑壤), 상산(常山) 등의 별칭으로 고쳐 사용되었다.

삼국시대에 이르러 진천 지역에 먼저 진출한 나라는 백제이다. 진천 지역은 백제의 서울이었던 한성이 진천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데다, 청주 지역이 이미 1세기 중반 백제 세력권에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백제가 진천이나 청주 지역에 진출한 시기를 『삼국사기』 기록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고고학 자료에 의거해 볼 때 적어도 3세기경까지는 진천을 포함한 중부 지역의 토착 세력들이 백제의 문화적 영향력을 받는 가운데 거의 반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남아 자치적이고 토착적인 지배권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진천의 삼룡리 가마터, 산수리 가마터, 덕산 석장리의 야철 유적지 등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백제에 이어 고구려가 진천 지역에 진출하였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때 남북으로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특히 그의 아들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천도하여 더욱 강력한 남진정책을 추구하였다. 그 결과 남한강 상류 지역인 충주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이 지역에 국원성(國原城)을 설치하여 남방진출의 교두보로 삼았다. 이 때 진천 지역도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으며, 금물노군을 설치하여 이곳을 다스렸다.

6세기 중반에는 신라가 진천 지역을 영유하였다. 550년 백제와 고구려가 도살성(道薩城)[현재 증평 추정]과 금현성(今峴城)[현재 진천 추정]을 두고 공방전을 벌이자 이 틈을 이용해 신라가 두 성을 장악하였다고 한다. 이 때 신라는 만노군(萬弩郡)을 설치하여 진천 지역을 통치하였다. 이곳은 신라의 한강 진출 교두보인 충주의 국원경에서 한강 하류 지역인 신주(新州)에 이르는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으며, 김서현(金舒鉉) 장군이 만노군 태수로 재직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7세기 후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진천 지역은 행정적으로 9주 가운데 한주(漢州)에 속하였으며, 그 명칭도 고구려 때 지명인 ‘금물노군’을 한식으로 개명하여 흑양군(黑壤郡, 黃壤郡)이 되었다. 그 영현으로 도서현(道西縣)과 음성현(陰城縣)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지금의 진천군, 음성군, 증평군 지역이다.

[고려시대]
진천은 후삼국시대에 삼국의 세력이 접경을 이루는 지역이었다. 특히 후백제와 고려가 진천을 비롯한 중부 지역을 세력권에 넣기 위하여 각축을 벌였다. 후삼국 초기에는 죽주의 기훤(箕萱) 영향력 아래 있다가 궁예(弓裔)[ ?~918]가 후고구려를 세우고 세력을 확대하여 충주, 청주, 괴산 등지를 차지했을 때인 900년 대 초에는 궁예의 세력권에 놓이게 되었다. 그 후 왕건(王建)[877~943]이 궁예왕을 몰아내고 국왕의 지위에 오르며 고려를 건국하자 진천의 호족들은 그에게 협조하였다. 반면 청주 세력들이 왕건의 즉위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진천은 반란 세력을 진압하는 군사적 거점으로 중요시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진천의 호족들은 중앙 귀족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특히 왕건에 의해 고려가 건국되자 진천임씨로 대표되는 이 지역의 호족은 고려에 내항하였으므로 항주(降州)로 칭하였다가 곧바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성종 대에는 상산이라는 별호를 갖게 되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고려 성종 때 진천을 ‘상산’이라는 별호로 불렀다고 하는데, 이것은 신라 말 고려 초 이래로 이곳에 거주하던 사람들 사이에 불리어져 오던 명칭이 고려 성종 대에 공식적인 별호로 정해진 것이다. 고려가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설치하였는데, 이 때 진천은 청주목 관하에 속해있었다. 이후 995년(성종 14) 10도제가 시행되었을 때에는 중원도의 소속으로 자사가 파견되었다. 한편 1018년(현종 9)에 전국을 5도와 양계를 골격으로 하는 대대적인 지방제도 개편이 이루어지자 진천은 양광도 소속의 청주목 관할 아래에 편성되었다.

무신란으로 무인정권이 성립된 뒤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이 때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는데, 진천은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망소이 형제가 일으킨 반란군에 점령되기도 하였다. 최씨 정권은 4대 60여 년간 권력을 독점해오다가 김준(金俊)임연 등에 의해 제거되기에 이르렀다.

진천임씨인 임연은 몽고 침입 시 진천 주민들을 모아 결사항전에 나서 몽고군을 물리치기도 하였으며, 그 공으로 대정에 임명된 뒤 출세를 거듭하였다. 그는 김준최의를 제거할 때 도운 공으로 위사공신에 임명되었으며, 진천을 그의 내향이라고 하여 창의현으로 승격시켰다. 1268년(원종 9)에는 임연김준을 제거하고 최고 집정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 창의현의령군으로 승격되어 지의령군사(知義寧郡事)가 임명되어 다스렸다. 그 후 임연과 그의 아들 임유무(林惟茂)[ ?~1270]가 제거되고 무인정권이 막을 내리자 고려 정부는 몽고에 항복한 뒤 몽고의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때 진천은 다시 진주로 이름이 바뀌고 감무가 파견되었다.

고려 후기에는 양광도와 충청도라는 도 명칭이 병용되기도 하였다. 진주 관할의 향·소·부곡이 3곳이나 있었는데, 김천향(金泉鄕)[현재 광혜원면 금곡리 소물], 향림부곡(香林部曲)[현재 이월면 송림리 향림], 협탄소(脇呑所)[현재 백곡면 갈월리]가 그것이다. 고려 후기 무신정권 시기에 진천 출신 임연이 실권을 장악하자 1259년(고종 46)에 청주의 속현이었던 진주창의현으로 승격하여 현령을 두었으며, 1269(원종 10)에는 의령군으로 승격되어 지의령군사가 다스렸다.

[조선시대]
고려가 멸망하고 신왕조인 조선이 개창되자 진천은 1395년(태조 4)에 충청도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대대적인 지방제도 개편이 이루어진 1413년(태종 13)에는 고려 말 명칭인 ‘진주’를 ‘진천’으로 변경한 뒤 청주목 관하에 소속시킨 뒤 현감을 두었다. 그 후 1505년(연산군 11)에 경기도에 이속시켰다가 1506년(중종 원)에 다시 충청도에 환원시켰다.

『세종실록지리지』 따르면 조선 초기 진천의 호구는 총 550호 1,923명이었고, 이 중 군정은 시위군 58명, 진군 10명, 선군 213명, 총 28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진천에 토착하여 살던 대표적인 성씨집단인 토성은 모두 10개 성으로 한(韓)·임(林)·송(宋)·심(沈)·유(庾)·미(彌)·고(高)·양(梁)·하(河)·장(張)씨 등이 있었다. 전체 경작 면적이 6,599결인데, 그 중에 논이 3/4 이상이었다. 토질은 오곡 및 조, 지초, 마, 콩 등에 알맞고 토산 공물로는 지초, 봉밀, 호피 등 피혁류가 있었다. 역은 장양(長陽)[현재 이월면 장양리], 퇴량(堆糧)[현재 문백면 태랑리] 등 2곳이 있었고, 봉수는 전국 5개 노선 가운데 제2거의 간봉에 딸린 소을산(所乙山) 봉수가 있었다.

진천의 지방관인 현감은 진천 지방의 행정을 총괄하였으며 유사시에는 진관체제에 따라 절제도위(節制都衛)가 되어 현 내의 군사를 지휘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천에서는 많은 의병이 일어나 왜군에 대항하였다. 진천 출신인 당시 음죽현감 이정영(李廷英)은 의병을 모집하여 신립 장군 휘하에 들어가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진천의 집강이자 향청의 책임을 맡았던 김효건(金孝蹇)[1584~1666]은 현민을 모아 왜적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또한 노량해전에서 왜의 수군을 격퇴하다 전사한 가리포첨사 겸 조방장 이영남(李英男)도 진천 출신이었다.

후금에 의해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진천 출신 인물들은 적극적으로 후금군에 맞서 싸웠다. 대표적으로 만주 부차성 전투에서 명군에 합류하여 싸우다 전사한 임현(林賢), 안주 전투에서 전사한 영유현감 송도남(宋圖南), 남한산성에서 끝까지 저항하다 전사한 김경세(金景世) 등을 들 수 있다.

조선 후기 영조 때 서인 이인좌가 청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진천 출신인 영장 남연년은 즉각 반군에 대항하다가 생포되었는데, 이 때 항복을 요구받았지만 끝내 거부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김천주(金天柱)·김천장(金天章) 형제와 그의 아들들은 지방민을 모아 반란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안재태(安載泰)·민진동(閔鎭東)·조중관(趙重觀) 등은 죽산전투에서 반군 두목을 잡는데 큰 공을 세웠다. 1862년에는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가혹한 수탈에 항의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진천 지역에서도 같은 해 5월 높게 책정된 결가 20냥을 경감해 달라는 요구를 하였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아를 습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진천현감을 지낸 이호신은 결가의 고액 책정과 공금 착복을 이유로 체포되었고, 신임 현감 김병유(金秉儒)는 즉각 파직되었다.

19세기 후반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진천 지역도 이에 호응하여 수천 명의 동학농민군이 관아를 점령하고 무기고에서 총포와 창칼 등을 탈취하였다. 진천 지역의 동학 지도자는 허문숙(許文淑)이었다. 허문숙은 교단의 온건 방침과 달리 급진적인 방법으로 동학의 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진천의 동학농민군은 안성과 이천 등지에서 보은으로 결집하던 농민군과 합세하여 충주의 일본군 병참부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근현대]
근대에 이르러 진천은 몇 차례 행정구역의 개편을 맞게 된다. 1895년(고종 32)에는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진천군으로 승격되었고, 1914년에는 전국적인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음성군 사다면의 풍동리와 사산리의 2개 리와 맹동면의 하서리, 두서리, 대화리, 상돈리, 하돈리, 신촌리의 6개 리, 그리고 대조면의 미곡리와 청안군 서면의 소백암리, 경기도 죽산군 남면의 동주원리와 가척리의 2개 리를 편입하여 진천, 군중, 만승, 초평, 문백, 이월, 백곡 등의 7개 면 80개 동리로 개편하였다.

1917년 12월 충청북도령 제11호에 의하여 군중면을 진천면으로 고치고 진천면 거락리를 문백면에, 사송과 명암의 2개 리를 백곡면에, 덕산면삼덕리를 진천면에, 오갑리초평면에, 문백면연담리초평면에 편입하고, 이어 1945년 4월 1일 청원군 북이면의 은암, 진암, 용산, 용기의 4개 리를 초평면에 편입하였다. 1973년 7월 1일 진천면이 진천읍으로 승격되어 현재 1읍 6개 면 83개 리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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