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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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六二五戰爭
이칭/별칭 한국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제우
[정의]
1950년 발생한 남·북한 전쟁 시기에 충청북도 진천 지역에서 전개된 7월 7일~10일의 싸움.

[개설]
좌익과 좌우 합작파의 반발 속에서 출범한 대한민국의 이승만 정부는 경제난까지 겹쳐 국민의 신임을 얻지 못하였다. 게다가 1948년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까지 일어나고 지리산과 태백산 일대에는 1950년 봄까지 좌익 게릴라 활동이 계속되어 내전에 가까운 상태로 치달았다. 1950년 5·3 총선거에서 이승만 지지 세력은 210석 중에서 겨우 30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설상가상으로 미군이 1949년 6월 군사고문단만 남겨놓고 철수하였고, 중국에는 1949년 10월 공산당 마오쩌둥[毛澤東]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바로 이즈음,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1951년 1월 태평양 지역의 방위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다고 선언하였다. 모든 사태가 한국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한편 남한의 어려운 사정과는 반대로 북한의 국력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소련의 스탈린과 중국의 마오쩌둥이 김일성 정권을 강력하게 지원하였다. 북한은 이미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될 때부터 남한을 적화시키겠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남한에서 빨치산 투쟁이 격렬해지자 훈련된 게릴라를 직접 파견하여 지도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북한군 의 병력과 무기도 소련과 중국의 지원으로 보병 10개 사단 13만 명, 1개 전차사단과 1개 비행단을 보유했다. 10만 명의 예비 병력까지 후반에 편성하고 또 중국으로부터 중공군에 참여했던 조선의용군 5만 명을 편입시켜 병력을 강화함으로써 병력면에서 북한은 남한을 월등하게 앞질렀다. 국군은 8개 사단 규모일 뿐만 아니라 전차도 없는 빈약한 상태였다.

전쟁 준비를 완료한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아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기하여 갑자기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 화력이 월등한 북한군 은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7월 6일에는 진천 지역으로 남하했다. 한국과 이미 상호방위원조협정을 맺고 있던 미국은 6월 26일 즉각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맥아더 장군을 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을 조직하여 파견하였다.

후퇴하던 국군은 수원 전선에서 재집결하였으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 에게 무너졌고, 일차 파병된 미군 제24사단 34연대 병력은 오산 죽미령과 평택에서 연이어 격파되었다. 진천은 6·25전쟁의 한복판에 놓이게 되었다. 남하하는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연합군 참전이 결정되자 국군은 시간 여유를 얻기 위해 지연전을 계획했으며 그 주방어선이 진천 지역이 되었다.

[전투 전의 개황]
1. 북한군 의 상황

북한군 제2사단[사단장 최현 소장]은 춘천을 점거한 다음 서울 동쪽으로 남진하려다가 제6사단[사단장 김종오 대령]의 타격을 받은 데 이어, 이천에서 남한군과의 충돌 및 미 공군의 공습으로 손실을 입으면서도 진천으로 밀어닥쳤다. 그들은 남한군을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서 포착하기 위해 제2사단을 중앙으로 하여 진천-청주를 직공함으로써 남한군 전선을 양단한 다음, 대전을 침공하려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따라 밤낮 구분 없이 전차 10대를 앞세우고 죽산으로 향하였고 7월 6일에는 제6사단 제19연대[연대장 민병권 중령]를 추격하면서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중산리 부근까지 진출하였다. 북한군 병력은 1만 2000명에 이르렀고, 주요 장비는 전차 10대를 비롯하여 자주포 12대, 122㎜ 곡사포 26문, 76㎜ 곡사포 13문, 45㎜ 대전차포 43문, 120㎜ 박격포 12문 등이었다.

2. 남한군의 상황

수도사단은 신설된 제1군단[군단장 김홍일 소장]에 편입되어 예하에는 제1연대, 제8연대, 제18연대가 소속되었으나 병력과 장비가 온전하지 못하였다. 7월 5일 오후 6시에 수도사단은 군단장으로부터 진천으로 전진하라는 구두명령을 받고 제1연대 제1대대[대대장 장태환 소령]는 병력과 장비를 보충받아 진천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제1연대 2개 대대와 제8연대, 제18연대도 병력을 보충하여 진천으로 출발하였다. 새로 창설된 제1포병대 제2포병중대는 수도사단을 직접 화력 지원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진천으로 향발한 사단의 총병력은 7,855명 규모이고, 주요 장비는 105㎜유탄포 4문, 81㎜박격포 16문, 60㎜박격포 27문 등이었다.

3. 진천군민 상황

생거진천(生居鎭川)이란 명구처럼 평화롭고 순박했던 진천 지역에도 전쟁의 소식이 전해졌다. 드디어 7월 6일에는 후퇴하던 국군과, 뒤를 이은 북한군 의 행렬이 광혜원을 거처 진천읍내 방향으로 내려갔다. 북한군 제2사단 주력부대인 2개 연대 규모의 병력과 전차 등의 장비가 광혜원에 집결하였다.

[진천 지구 전투]
7월 6일 오전 10시에 급행군으로 수도사단 제1연대 제1대대의 선봉 제1중대[중대장 윤흥정 중위]가 중산리에 이르러, 철수하던 제6사단 제19연대 후위 중대와 합세한 다음 진천-청주 도로를 중심으로 진지를 마련하였다. 이 무렵부터 북한군 은 포격하기 시작하면서 1개 소대 규모의 수색대가 국군 진지까지 침투해왔다가 양 중대의 잠복조에 의해 격퇴되었다.

1. 진천 중산리 전투와 진천 공방전

7월 7일 오후 2시,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송림리에 북한군 제2사단 예하 제6연대가 전차를 앞세우고 개미떼 같이 내려오면서 국군 진지를 포격해왔다. 그러나 중산리에 와서는 행군대열로 바꾸고 전차도 동반하지 않은 채 남하하였다. 이를 지켜보던 중대장 윤흥정 중위는 그 선두가 지근거리에 이르렀을 때 맹렬히 사격을 가하였고, 북한군 은 중산리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국군 양 중대의 위치가 폭로되었고, 북한군 이 대병력을 양분하여 남진과 우회하면서 포격해옴으로써 양 중대는 중산리에서 후퇴하여 야산에 진지를 구축하였다. 사단의 주력부대와 장비는 다음날 오후 3시 이후에 도착 예정이었다.

7월 7일 수도사단장 이준식 준장이 돌연 교차되어 현직에서 떠나고 김석원 준장이 재야에서 기용되어 대전을 출발, 밤늦게 사단사령부[역리에서 3㎞ 북쪽 여사로]에 도착하여 주력이 도착할 때까지 진천을 고수하라는 작전을 진두지휘하였다. 7월 8일 오전 8시 북한군 은 보병을 동반한 전차 수대로 급진 남파하여 국군 양 중대의 거점을 점령하였다. 국군 양 중대는 진천으로 빠져나가 제1연대 주력으로 수용되었고, 이어 백곡천 남쪽 제방을 의지하여 저지 진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오후 4시 50분에 북한군 제2사단의 전차를 동반한 맹공격을 받았다. 악전고투 끝에 결국 방어선이 무너졌고, 국군은 잣고개로 철수하여 사단 주력에 합세하였다.

수도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독립기갑연대 장갑 제1중대장 박용실 대위는 수색용 장갑차 3대를 이끌고 사단에 도착하였다. 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박용실 대위에게 진천의 북한군 을 격퇴하고 오라고 명하였다. 해질 무렵 박용실 대위는 장갑차 2대만을 이끌고 잣고개를 출발, 진천읍내로 매진하여 미동도 하지 않던 북한 전차 3대를 철갑탄과 산탄으로 번갈아 공격하면서 돌진하여 전차 1대를 명중시켰다. 이에 당혹한 북한군 은 전차 2대로 몇 발 사격하고는 도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 중대는 장갑차 2대를 도랑에 빠뜨려 잃었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

제1연대가 잣고개에서 정비하는 동안 제8연대와 제18연대가 도착하였고 군단 예비 제2사단 제20연대와 제17연대, 독립기갑연대, 제1포병단 1개 중대[곡사포 4문] 등을 지원받아 사단의 전투력은 크게 보강되었다. 사단장은 제18연대를 문안산에, 제8연대를 봉화산에, 그리고 선착한 독립기갑연대와 제1연대는 중앙의 잣고개에 투입하여 문안산-잣고개-봉화산의 고지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하였다. 한편 제17연대[연대장 김희중 중령]는 상계리에 사단예비로 배치하였다.

수도사단이 부대 정비와 진지 편성을 마치기도 전에 북한군 은 새벽부터 쏟아지는 폭우와 함께 7월 9일 오전 9시에 보병 전차대포의 일제 공격으로 주저항선인 봉화산, 잣고개 그리고 문안산으로 밀려들었다. 진흙구덩이가 된 개인호와 교통호는 비 오듯 퍼붓는 포탄으로 말미암아 뒤범벅이 된 데다 사상자가 속출하자 병사들도 공포에 질려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선에서부터 거듭된 철수와 계속된 항군 등으로 병사들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

뿐만 아니라 행군 도중에 틈틈이 재편한 까닭으로 서로 간에 소외감이 생겨 기회만 있으면 대열에서 벗어나보려는 심리가 있었으므로 전의(戰意)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이런 극한 상황에서 병력과 장비면에서 월등히 우세한 북한군 을 맞아 급기야 교전 몇 번 만에 국군의 주저항선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정오에 적은 진천을 중심으로 남쪽 2.5㎞에 이르는 문안산-잣고개-봉화산을 낀 반월형의 거점을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주저항선이 무너지자 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통분을 감추지 못한 채 적의 포탄이 비 오듯하는 잣고개 남쪽 기슭에까지 나가 군도를 뽑아들고 “한 사람의 병사라도 이 곳에서 물러날 수 없다. 너희들이 싸우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 어서 모여라.”라고 소리치며 병력 수습에 나섰다. 사단장은 일거에 진천을 탈취하기로 결심하고 군단장의 승인 하에 제20연대를 사단으로 배속하는 한편, 진천 동쪽을 엄호하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따라 사단장은 다음과 같은 요지의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7월 9일 오후 1시 30분을 기하여 공격을 개시, 덕원리-봉화산-문안산을 탈취한 후 진천을 공격한다. 제2사단은 사단 우익에서 협동 공격할 것이고, 제18연대는 사단의 우일선으로서 봉화산의 적을 격파하고 진천 동측을 탈취한다. 제8연대는 사단의 좌일선으로서 문안산의 적을 격파하고 진천 서측을 탈취한다. 제1연대는 독립기갑연대의 도보대대를 통합 지휘하여 도로 부근의 적을 치고 잣고개를 탈취한 다음, 계속 진천을 목표로 진격한다. 배속부대 제20연대는 사단의 우측에서 덕원리를 탈취한 후 진천 동측을 목표로 진격하고, 제17연대는 사단의 좌측에서 문안산 서쪽의 무명고지를 탈취한 후 적의 우회를 분쇄하며, 공격 개시선은 현 접촉선인 돌패기-사석리-양천산 선이다.

2. 덕원리 전투

제2사단 제16연대[연대장 문용채 중령]는 7월 9일 오후 1시에 구곡리-소가리에 이르러 1개 중대로 하여금 연대주력의 엄호 아래 상덕리를 거쳐 진천읍내로 돌입하고자 장월리와 상덕리로 직진하였다. 그러나 북한군 의 탄막 사격으로 중대는 분산되고, 북한군 1개 대대의 규모가 상덕리까지 진격하여 마침내 연대장은 범바위 우측으로 물러났다.

제20연대 김한주 소령은 연대의 주력 1개 대대를 지휘하여 신정리까지 진출하였으나 덕원리로부터 잠입한 것으로 보이는 북한군 에 의하여 왼쪽을 기습당했다. 이때 연대장 박기병 대령[여사의 사단장에게 전입신고를 하고 돌아옴]은 철수를 명령하여 원위치로 물러나 진지를 보강하도록 하였다.

3. 봉화산 전투

7월 9일 오후 1시 30분, 제1연대[연대장 이희권 중령] 제1대대[대대장 장태환 소령]는 제2중대[중대장, 박규화 중위]를 좌측, 제3중대[중대장, 윤흥정 중위]를 우측으로 한 결사대와 기갑연대의 장갑차로 도로를 따라 진격하였다. 한 부대는 북한군 이 주둔한 봉화산 정상 부근까지 육박하였으나, 이곳은 급경사인데다가 적의 저항이 완강하여 전진이 저지되었다.

그러나 연대의 105㎜박격포와 대대장의 81㎜박격포의 정밀 사격, 양 중대의 과감한 돌격 근접전으로 정상을 점령하였다. 고지 정상의 한 기관총 진지에는 북한군 사수가 발목에 쇠사슬이 묶인 채 죽어 있었으며, 주변에는 시체와 더불어 퇴각하면서 버린 소총과 권총, 쌍안경 등이 널려 있었다.

힘겹게 점령한 봉화산은 30분 후 북한군 의 역습으로 바로 빼앗겼다. 한편 제1연대와 병행 공격하던 기갑연대도 북한군 의 공격을 격퇴하고 잣고개를 점령하였으나, 적의 역습을 받고 철수하고 말았다. 이에 제1연대가 봉화산에서 물러나자 사단장은 사단 예비인 제18연대에게 봉화산 2차 공격 임무를 부여하였다. 그리하여 제5중대[중대장 손영진 중위]는 봉화산의 연봉인 ‘나’고지를, 제6중대[중대장 김정운 중위]는 봉화산 주봉인 ‘가’고지를, 제7중대[중대장 장재민 중위]는 양 중대의 사이에서 적의 계곡 접근을 막기로 하고 공격에 나섰다.

북한군 은 1개 대대 규모의 최후 저지사격으로 보이는 전·화력의 집중 사격과 수류탄을 던져 저항하였다. 그러나 국군은 대대장 장춘권 소령의 지휘와 중화기 중대[중대장 이용준 중위]의 전·화기 제압, 양 중대의 돌진으로 ‘나’고지와 ‘가’고지를 탈취하였다. 대대장은 정상에 대대 지휘소를 설치하고 적의 역습에 대비해 만전을 기하였다. 중대장 김정운 중위를 비롯한 국군은 몇 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적을 격퇴하였으며, 진지 점검 중 호 속에서 1개 분대의 적군을 발견하고 모두 사살하였다.

아침 해가 뜨면서 국군은 많은 시체를 버린 채 퇴각하였다. 제2대대장 장춘권 소령은 연대장 임충식 중령에게 주간 기습으로라도 진천읍으로 돌입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연대장은 진천읍 점령 대신에 그들의 전진 진지를 탈취하여 기습을 사전에 막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9일 오후 5시에 제6중대[중대장 김정운 중위]는 진천읍 교성리에 이르렀다가 적의 역습을 받았고, 중대장은 복부관통상으로 쓰러졌으며 잔류 부대는 뒤로 밀려났다.

이때 봉화산 주봉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부연대장 한신 중령은 권총을 빼들고 쏟아지는 총탄 속에서 중대를 직접 지휘하였고, 뒤이어 대대장 장춘권 소령도 1개 소대를 이끌고 달려가 합세하여 적을 물리치고 진지를 확보하였다. 연대 인사주임 이병형 대위는 기관총[cal 50]을 직접 사격하여 중대를 엄호하였다. 피 흘려 고수한 보람도 없이 오후 6시에 연대의 철수 명령에 따라 봉화산은 북한군 수중에 넘어갔다. 이 봉화산 전투에서 연대의 손실은 50명에 이르렀다.

4. 문안산 전투

7월 9일 오후 1시 30분부터 돌패기[석박]-상계리 간의 공격 개시선으로 나오기로 한 제8연대[연대장 이현진 중령]는 우측에서 문안산을 직공하기로 하고, 제17연대[연대장 김희중 중령]는 좌측에서 문안산 서쪽 기슭을 우회하여 적의 우측을 격퇴하였다. 제8연대 제2대대[대대장 정승화 중령]의 공격에 앞서 사단장은 장병들에게 “그대들은 들으라. 적은 1개 연대뿐이고 우리는 1개 사단이다. 포탄을 퍼부을 터이니 저 고지를 점령하라.”고 격려하고, 105㎜곡사포와 새로 보급된 81㎜박격포를 적진에 퍼부었다. 대대는 북한군 의 사격이 뜸한 틈을 타서 돌격하여 정상의 일각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사단장은 중화기 중대[중대장 김종민 중위]에도 찾아가 격려하고 사기를 고취하였다. 각 소속 부대는 돌진, 또 돌진하여 근접전을 치른 끝에 문안산을 점령하였다. 얼마 후 연대장의 명령으로 제2대대는 봉화산 서쪽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제17연대 제1대대[대대장 이관수 소령]는 우일선으로, 제1중대[중대장 김필상 중위]는 좌일선으로, 제3중대[중대장 장익재 중위]는 제2중대[중대장 한혁 중위]의 예비로 하여 오후 1시 30분에 문안산 공격을 개시하였다.

적군의 화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격해져 사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제3중대[중대장 장익재 중위의 엄지손가락 부상으로 지휘를 제1소대장 윤종한 중위가 맡음]는 포탄이 작렬하는 탄막을 뚫고 능선까지 육박하였고, 오후 5시경에는 정상의 좌측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제1중대도 중대장 이하 전 소대장이 전사하거나 부상[중대장 부상, 소대장 조모 중위는 전사]당하고, 반 이상의 병력을 손실하는 격전을 겪으면서 적을 격퇴한 것이다. 그러나 7월 10일, 오전 1시에 시작된 북한군 의 야간 기습으로 순식간에 문안산 방수진은 무너지고 말았다. 북한군 은 같은 시각에 감행한 봉화산 잠입에 각종 화력을 집중 사용한 데 반하여, 문안산 고지에는 아군의 경계조와 잠복조를 죽이고 교전 몇 번 만에 정상 고지를 탈취하였다.

각개로 분산된 제17연대는 문안산 남쪽 기슭에서 병력을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김석원 준장은 “적이 재편하기 전에 문안산을 되찾아야 한다. 시간을 지체하면 할수록 병력 손실이 많아지고 탈환하기 힘들다.”라고 독려하였다. 이에 따라 우로는 장태환 소령이 지휘하는 제1연대의 주력인 제1대대가, 좌로는 이관수 소령이 이끄는 제17연대 주력인 제1대대가 각각 전개하여 포병화력의 지원 없이 야습을 강행하였다.

제1연대 장태환 소령의 대대는 북한군 의 최후 저지사격인 듯한 맹사와 함께 수류탄 공격에 4진 5퇴하는 혈전을 전개하였고, 제2중대 박규중 중위는 로켓포로 북한군 의 기관총을 단숨에 박멸하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돌진하여 분전난격 끝에 문안산을 점령하였다. 정상에서는 절로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공격에서 북한군 의 시체는 200구에 이르렀고, 기관총 10정을 포함하여 기타 소총류를 노획하였음을 볼 때 1개 대대 규모의 적을 섬멸한 것으로 추산된다.

양군의 기습공격으로 뺏고 뺏기는 혈투가 연속되면서 북한군 도 지쳤는지 저녁 무렵까지 포격만 가하는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오후 4시에 이르자 북한군 은 1개 대대 규모로 제2중대 지근까지 접근하였고, 고지 정상에서는 순식간에 혼전상태가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제1중대장 윤흥정 중위와 대대장 장태환이 관통상을 입었고, 대대는 제2중대장 박규화 중위가 지휘하게 되었다.

양 중대 병력도 각각 1개 소대 병력 정도만 남았으며, 탄약마저 떨어져 쓰러진 전우나 적군의 시체에서 탄약을 거둬 써야 할 만큼 악전고투하였다. 제17연대의 주력인 제1대대[대대장 이관수 소령]는 문안산 서북쪽 330고지[태령산]의 1개 대대 규모로 추산되는 적으로부터 치열한 화력을 받았다. 이에 대대는 즉각 대대 공격 대형으로 전개하면서 중화기 중대[중대장 이홍근 중위]의 전 화력을 집중하고 포병 중대도 일제 사격을 퍼부으면서 진격하였다.

쌍방이 진퇴를 거듭하다가 백경섭 소위가 지휘하는 특공대 30명의 고지 일부 장악을 신호로 백병전 끝에 정상을 장악하였다. 이 전투에서 국군의 손실도 많았다. 그 까닭은 이날의 구호가 ‘손들라’ 하면 ‘들었다’로 대답하는 것이었는데, 병사들은 서로 낯익은 소리에 대답하지 않았다가 적군으로 오인되어 사살되는가 하면, 서로 머리를 빡빡 깎았기 때문에 [제17연대는 대전서 머리를 깎음] 머리를 만져보고 머리가 짧으면 적군으로 알고 사살했기에 목숨을 잃은 병사도 있었기 때문이다. 동이 트자 시야에는 널린 북한군 의 시체뿐이었고 피비린내가 산야를 메웠다. 정상에는 50여구의 시체와 8㎜박격포 3문을 비롯하여 기관총, 소총 등이 헤아릴 수 없이 산적해 있었다. 한편 대대도 소대장 1명 외에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북한군 은 사단의 반격으로 말미암아 1개 연대 규모가 궤멸되었다. 봉화산-문안산-대령산[330고지]을 사단이 장악하자 북한군 은 산발적인 탐색전과 포격으로 사단의 진천읍 진출을 저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양천산 동측 방향으로 우회 침공을 기도하기도 했다. 한편 사단은 봉화산·문안산·태령산을 수중에 넣기는 하였으나 진천으로 약진할 여력이 없었다. 이 무렵 미군 관할 경부국도 방면의 전의가 위협받아 군단의 동과 서측 전선이 남하하고, 사단도 후방 동서 양측으로부터 협격될 우려가 짙어, 전선의 균형을 위해 청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후 4시에 사단은 예하부대에 배속된 제17연대와 제20연대 엄호 하에 청주 미호천으로 철수하였다.

사단이 철수를 서두르고 있을 무렵 북한군 제2사단은 작전을 전환하여 우회 기동으로 수도사단의 배후 차단을 기도하였다. 일부 병력으로 문안산을 양공하면서 주공 부대로 진천 남동의 신정리장월리에 배치된 제20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유엔 공군 B29와 B26 폭격기 편대가 출동하여 진천읍-신정리-범바위 일대의 북한군 병력과 장비를 목표로 1시간 이상 맹폭하고, 이어서 F51전투기가 기총사격과 네이팜탄을 투하하였다.

이와 같이 수도사단은 유엔 공군의 엄호를 받아 진천 지역에서 철수하였고, 적군이 병력을 수습하여 양천산 일대로 공격을 재개하였을 때는 사단 엄호를 맡았던 제17연대와 제20연대도 천신만고 끝에 철수한 후였다. 이로써 6·25전쟁 진천전투는 막을 내렸다. 이후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으로 전쟁이 멈추게 될 때까지 진천 지역에서는 남·북한군 간의 전투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결과]
6·25전쟁 중 진천 중산리 전투는 적의 대전 침공기도를 분쇄하는 동시에 아군의 전선 정제(整齊)를 위한 시간 여유를 얻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이 전투 이후 “이제 이 마당에서는 적과 싸울 만하다. 여기서 후퇴하면 우리가 설 땅이 없다.”라는 굳은 결의가 생겼다. 이에 반하여 북한군 은 남침하면 할수록 발을 기관총에 쇠사슬로 묶어놓는 인면수심의 수법으로 독전하는가 하면, 전술마저 궁해져 무능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진천은 6·25전쟁 초기에 수도사단[사단장 김석원 준장]이 주축이 되어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북한 제2사단[사단장 최현]을 육탄으로 막아낸 격전장이다. 1976년 8월 진천군민들은 이 전투에서 산화한 무명용사들의 충혼을 위로하고 그 공을 빛내기 위하여 잣고개6·25격전지 반공투사 위령비를 세웠다.

전쟁 중 서울이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피난민 중 일부와 재경 유학생이 고향 진천으로 귀향하기는 했지만, 진천 사람들이 피난을 떠난 수는 많지 않았으며 대부분은 읍소재지 인근 또는 농촌 마을에서 전쟁을 겪었다. 군민들은 포탄과 총알이 비 오듯 퍼붓는 모습을 보고 또 굉음을 들으면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공포에 떨어야 했다. 수도사단이 주둔했을 때 김석원 사단장은 전투 지역 내의 학생·청년 등 200여 명을 탄약 및 식사 운반 등 전투근무 지원 업무에 운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선 부녀자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사단이 철수할 때는 이들을 모두 귀가 조치하였다. 반면에 적은 아군의 공습으로 보급이 단절되다시피 하여 현지 약탈로 연명하여야 할 상태였으므로, 진천 각 마을에 진입·주둔하면서 식사 제공을 강박하였다. 북한은 남한 점령지에 인민내무소[파출소]와 인민위원회를 설치하여 만 17세 이상 45세까지 자원이라는 미명 아래 의용군을 지원·차출하여 수천 명의 노역을 강제 동원하였다. 불응한 사람이나 한국 정부관련 인사는 반동분자로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공개처형하였다.

더욱이 과거 지주의 토지를 무상 몰수, 무상 분배한다고 하면서 추수를 앞두고 벼·콩 등 곡식 낟알을 세기도 하였다. 다행히 9·28수복으로 현물세는 내지 않아도 되었다. 6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백곡 어느 마을에서는 청년 25명이 끌려가다가 공습 기회를 틈타 17명은 살아 돌아왔으나 8명은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고 하며, 일부 인사는 깊은 산속이나 근처에 은신해 있으면서 아이들이 쇠풀 베러가면서 몰래 음식을 보급해 주었다고 한다. 6·25전쟁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도 3개월 가까이 생지옥과 같은 상처를 남겼다. 진천은 빨치산이 은신할 정도의 큰 산줄기나 험준한 산이 없어서 정규군이 전투를 벌이고 지나간 뒤 후속 전투는 이어지지 않았다.

6·25전쟁은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참혹한 내전이었다. 내전의 쌍방은 적대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오로지 무력으로 철저히 상대방을 파괴하려 하였다. 또한 6·25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된 냉전 체제의 대리전쟁 성격도 가졌다. 이에 따라 최신 외국 무기가 우리 국토에 대량 들어왔고 대규모 살상과 파괴가 자행되었다. 인명 손실만도 남북을 합해서 500만 명을 넘었다. 전국이 전쟁터가 되어서 3년에 걸쳐 전쟁을 벌였던 까닭에 전통 사회생활의 기본 틀이 무너졌다. 그것은 우리 민족 전체가 같이 경험한 것으로서 엄청난 참화가 가져다준 변화였다.

주요 전쟁터의 하나였던 진천에서도 읍내의 주요 건물과 민가가 불에 타 폐허가 되었고, 군청과 등기소가 불에 타 호적과 등기 문서가 인멸되었다. 이 때문에 전후 등기문서 등을 새로 작성하는 데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고, 오랫동안 복구사업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휴전 직후에는 전국에서 집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이 200만 명에 이르렀으며, 국민의 1/4가량이 굶주렸다. 진천 사람들도 경제난으로 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전국 각지에서 북한군 의 점령 기간에 좌익이 나서서 우익을 처단하는 일이 벌어졌고, 전세가 바뀌어 국군이 진주한 뒤에는 정반대의 사건이 벌어졌다. 이리하여 서로 밀고해서 처형하도록 조장하는 등 후유증이 심각하였다. 한 고향 사람 내부의 불신과 적대감이 극에 달해 이전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회복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진천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역 사회에서 겪은 6·25전쟁은 몇 백 년 내려온 전통 사회의 구조 자체를 변모시켰다. 당시 엄청난 인구가 피난하거나 살아남기 위해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타지나 도시로 나가서 오래 살다가 고향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래서 고향뿐 아니라 도시와 먼 지역의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기존 생활방식과 관념을 바꾸면서 살아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크게 바뀐 것이 상하 관계의 신분 의식을 버리게 된 것이다. 1894년에 공포한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는 폐지되었으나 양반과 상민의 위계질서는 향촌 사회의 관행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6·25전쟁은 양반들의 권위를 추락시켰다. 피난살이와 군대 징집에는 반상(班常)의 구별이 없었다. 또한 엄청난 구미 문화가 국내에 쏟아져 들어왔다. 미국 문화는 전파력이 강해 젊은 층에게서 기존 문화 관습을 소멸시켰다. 전쟁 복구사업과 경제 발전에 따라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진천에서도 많은 인구가 도시로 떠났고 지역 사회도 격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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