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수리시설, 벽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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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最初-水利施設-碧骨堤
영어의미역 The First Irrigation Facility of Korea, Byeokgolj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 119-1지도보기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나종우
[개설]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 에 있는 백제시대의 수리 시설인 벽골제(碧骨堤)는 노령산맥(蘆嶺山脈)의 중봉인 모악산(母岳山)·구성산(九城山)·상두산(象頭山) 등에서 발원한 풍부한 물이 흘러 이루어진 원평천(院坪川)·두월천(斗月川)·감곡천(甘谷川)·금구천(金溝川)·신복천·오주천의 물을 모았다가, 금만평야를 비롯하여 정읍과 부안군 일부 지역 농지에 농업용수로 공급하였다.

[벽골제의 역사적 환경]
오늘날의 김제 지역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로서 54개 소국 가운데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했던 벽비리국(辟卑離國)이 있었다. 마한이 백제에 병합 뒤 벽골군(碧骨郡)이 되었고, 이때를 전후하여 벽골제가 축조되었다.

그런데 당시 김제 지역의 지명을 살펴보면 고유한 옛말을 한자를 빌려 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마한의 벽비리국이나 백제의 벽골은 ‘벼고을’의 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그 뜻을 한자로 표기하면 화곡(禾谷), 도향(稻鄕)이 된다. 이는 삼국시대부터 김제가 도작 농경의 중심지임을 말해 주고 있다.

[김제 지역의 지형과 하천]
김제 지역의 지세(地勢)는 대체로 동남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 경역(境域) 거의 다 해발 고도 30m 이하의 평야 또는 준평원(準平原)이어서 높은 산이 드물다. 그 때문에 옛날부터 김제·만경평야를 일컫는 징게맹게외배미들 또는 대평(大坪)으로 불러 왔거니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호남평야 중심부이다.

김제 지역을 흐르는 하천은 크게 북부의 만경강(萬頃江) 수계(水系)와 남부의 동진강(東津江) 수계로 나눈다. 만경강 수계에는 재남천(才南川)과 부용천(芙蓉川)을 비롯한 북부 각 면의 작은 하천들이 속하며 모두 북쪽으로 흐른다. 완주군 이서면의 여러 시내가 모인 재남천은 용지면 동북부를 거쳐 백구면 동부 마전에서 만경강으로 흘러든다.

동진강 수계에는 신평천(新坪川)원평천이 있다. 백산면에서 발원한 신평천은 시내의 서부, 교동월촌동 북부, 성덕면의 시내들을 합치면서 서남쪽으로 흘러 성덕면 한포에서 계화만으로 흘러든다.

원평천은 시내에서 가장 큰 하천으로 수원이 다섯이다. 상두산에서 발원한 본류는 금산면 남부의 계류(溪流)들을 모아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서쪽으로 흐르면서 금산천(金山川)·금구천·감곡천·두월천 등 지류와 수많은 시내들을 합치고, 죽산면을 가로질러 명량산(明良山) 서쪽에서 동진강 하구로 흘러든다.

금산면 북부의 금산천은 모악산의 여러 계류들을 모아 서쪽으로 흐르면서 원평 서쪽에서 본류와 합류한다. 금구천구성산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금구면 남부, 황산면 남부, 금산면 서부, 봉남면 동부의 물을 모아 봉남면 종정(從政)에서 합류한다.

정읍시 감곡면의 시내가 모여 이루어진 감곡천은 서북쪽으로 흘러 봉남면 서부에서 본류와 합수한다. 두월천은 완주군 구이면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금구면 북부, 황산면 북서부, 봉남면 서부, 교동월촌동 남부의 시내들을 합치고 본류와 만난다. 벽골제는 이 원평천의 중류, 두월천 합수 지점 서쪽, 교동월촌동부량면의 접경인 포교 부근에 있다.

[벼농사의 시작과 벽골제]
고대의 경제력은 거의 모두 농업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백제도 건국 초기부터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국가적인 관심을 기울였다. 3세기 말 백제는 마한의 여러 소국들을 아우르고 노령산맥 이북까지 진출하였고,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때에는 노령산맥 이남의 마한 잔존 세력들을 복속하여 오늘날의 전라남도 해안 지방까지 판도를 넓혔다.

고이왕으로부터 근초고왕에 이르는 80여 년간의 이 시기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준비 기간으로서, 마한 세력을 완전히 아우르고 기후가 온난하고 넓은 평야가 있는 서남 지방을 지배권에 넣어 수전(水田) 도작을 장려하고 관개 시설을 정비하는 대역사를 일으켜 경제적 기반을 다져 나갔다. 벽골제, 눌제 등의 대역사가 이루어진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시대에 벼농사와 벽골제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온조왕 14년(기원전 5) 2월에 왕이 부락을 순무(巡撫)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권장”하였고, “다루왕 6년(33) 2월에 나라 남쪽 주군(州郡)들에게 영을 내려 처음으로 논을 만들게 하였다.” “구수왕 9년(222) 2월에 관리에게 명령하여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고, 3월에는 영을 내려 농사를 권장하였다.”

“고이왕 9년(242) 2월에 나라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남쪽 진펄[南澤]에 논을 개간하게” 하였고, “흘해이사금 21년(330) 비로소 벽골지(碧骨池)를 개척하니 그 둑의 길이가 1,800보였다.” “무령왕 10년(510) 봄 정월에 영을 내려 제방들을 튼튼히 막게 하고 서울과 지방에서 놀고먹는 자들을 모아서 농사를 짓도록 하였다.”

이상의 기사로 살펴본다면 백제는 건국 초인 온조왕 때부터 농업에 관심을 두었고, 모두 한강 이남을 논으로 개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다루왕 때 나라 남쪽 주군에 논을 만들게 한 사실이라든가, 고이왕 때 진펄에다가 논을 만들게 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조건이 우선 갖춰져야 한다. 즉 평평한 습지가 있어야 하고, 동원 가능한 많은 인력이 있어야 한다. 벽골제의 경우, 벽골제를 개척한 흘해이사금 21년은 곧 백제 비류왕 27년으로 당시 김제는 백제 영토였으므로 백제는 벽골제를 쌓기 위해 총 인원 322,500명 이상을 동원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백제가 막대한 농업 생산력을 집중시켜 국가 유지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관개 시설을 축조하기 위해 대규모의 노동력을 징발했다는 것은 중앙 집권 국가로 진입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수리 시설을 마련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백제는 남방 경략으로 얻은 전라도 지방에서 벽골제를 이용한 관개용수의 공급을 바탕으로 도전(稻田) 경영에 힘썼으며, 이를 통해 축적한 부를 토대로 중국 및 왜국과 활발하게 교역하였고 문화 교류를 전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수리 시설로서 지(池)와 제(堤)는 흘러내리거나 솟아나는 물을 인위적으로 막아 모아 두는 토축(土築) 시설로서 자연적으로 물이 고여 있는 택(澤)과는 다르다. 이러한 사실은 지형 조건이나 관개하는 방식이 저습지의 수전(水田)과 달라진 것만은 분명하다.

[벽골제의 축조 연대와 규모]
벽골제 축조 시기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에는 “흘해이사금 21년(330) 비로소 벽골지를 개척하니 그 둑의 길이가 1,800보[訖解尼師今 二十一年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삼국유사(三國遺事)』「왕력편(王曆篇)」에는 “을축년(329) 벽골제가 시축되었는데, 둘레가 ○7,026보, ○○가 166보, 논이 14,070○[己丑 始築碧骨堤 周○萬七千二十六步 ○○百六十六步 水田一萬四千七十○]”라고 기록되어 있다.

두 기록이 1년 차이가 나는 것은 선학들이 기록을 잘못한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거니와, 이 시기 김제 지역은 분명 백제 영토로 벽골제는 당연히 백제 사람들의 기술과 힘으로 이룩된 것임에도 신라 흘해왕이라 표기한 것은 후세 사가들이 통일신라 사기에 맞추느라고 신라 16대 흘해왕으로 적은 것으로 보고 있다[김상기 설].

이병도(李丙燾)도 『역주 삼국사기』에서 “이는 필경 백제기(百濟紀) 에 실을 사실을 잘못 이곳에 옮겨 놓은 것 같다.”고 하여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으며, 단재 신채호(申采浩)도 『조선사연구초』에서 벽골제는 백제 초기에 축조되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벽골제가 백제인의 손으로 축조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나 아직도 일부에서는 조심스럽게 의문을 나타내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초 역시 『삼국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10권 기록에 따르면 “원성왕 6년(790) 벽골제를 증축하기 위하여 전주 등 7개 주(州)의 사람을 동원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때 증축한 벽골제는 김제에 있는 제방이 틀림없다고 판단되므로 앞의 흘해왕이라는 표기는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벽골제를 중축하기 33년 전인 경덕왕 16년(757)에 주군을 개편할 때 백제시대의 벽골현을 김제군으로 개명(改名)한 사실이 있다. 그리고 처음 벽골제를 축조한 시기에 대해 아직도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 결과 문헌에 전하는 시기인 330년과 들어맞아 과학적으로 증명된 셈이라 할 수 있다.

벽골제의 규모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차이가 있다. 『삼국사기』에는 길이를 안(岸) 1,800보라 하였고,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장(長) 7,196척이라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제지장(堤之長) 60,843척이라 하였다. 이처럼 차이가 나는 것은 당시 쓰던 단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수치들을 오늘날의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삼국사기』의 기록은 약 3,245m, 『태종실록』의 기록은 약 3,362m이다. 그런데 지난 1975년 벽골제 발굴 작업을 하면서 제방 길이를 실측한 결과 약 3,300m로 확인되어 실제 길이와 문헌 기록이 합치하였다.

[벽골제의 중수와 개수]
1. 신라시대

벽골제는 백제 전기인 4세기 초반 축조되어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면서 여러 차례 중수가 이루어졌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라 통일기인 원성왕 6년(790) 전주 등 7개 주의 사람을 동원하여 증축이 이루어졌다. 이 무렵의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120여 년이 지난 시기로, 전제 왕권이 왕성하고 국력이 신장되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 같은 중수가 가능했으리라고 여겨진다.

2.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들어서 벽골제에 관한 기록은 『고려사(高麗史)』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종 24년 2월 경신, 무당의 말을 믿고 내시(內侍) 봉열(奉說)을 파견하여 김제군에서 새로 수축한 벽골지의 언제(堰堤)를 터놓게 하였다.” “김제현은 원래 백제의 벽골군인데 신라 경덕왕김제군으로 고쳤다. …… 인종 21년(1143)에 현령을 두었으며 이 현에 벽골제가 있는데 언제의 길이가 1,800보이다.” “고려 현종 대에 옛 모습대로 수리하고 인종 21년에 증수(增修)하였다.”

3. 조선시대

조선은 개국 후 정치적 혼란과 왜구의 잦은 출몰로 피폐해진 농토를 복구하고 국력을 신장시키고자 중농 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태조 때 전제 개혁과 더불어 수리 사업을 활발하게 벌였고, 태종 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개수와 보수를 실시하였다.

문헌에 나타난 관련 기사를 보자. “태종 8년(1408)에 전라도 병마절제사 강사덕(姜思德)벽골제를 수축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따르면 ‘김제군벽골제는 둑 밑이 아득하고 넓고 비옥하며, 제언의 고기(古基)가 산같이 견고하고 튼튼하니, 바라건대 예전과 같이 수축하고 혁파한 사사(寺社) 노비로 둔전을 경작하게 하여 국용(國用)에 보태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종 15년(1415) 8월 1일 을축(乙丑); 명하여 김제군 벽골제를 쌓았다. 전라도 도관찰사 박습(朴習)이 아뢰었다. ‘오직 김제의 벽골제는 신도 또한 한 번 가서 보았는데, 그 둑을 쌓은 곳이 길이가 7,196척이고 넓이가 50척이며 수문이 네 군데인데, 가운데 세 곳은 모두 돌기둥을 세웠고 둑 위의 저수한 곳이 거의 일식(一息)이나 되고, 둑 아래의 묵은땅이 광활하기가 제(堤)의 3배나 됩니다.’”

기사의 내용대로 조정에서는 1408년 강사덕의 건의로 벽골제의 수축을 명하였다. 1415년 박습은 장흥·고흥·광양의 3읍을 먼저 축성하고 벽골제의 수축을 뒤로 미루자고 건의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벽골제를 먼저 수축하라고 하였다.

이 당시에도 왜구들의 침입이 자행되고 있었고, 위의 3읍은 고려 때부터 왜구의 출몰이 잦은 지역인데 성이 퇴락하여 위험하니 수축해야 한다는 것이 박습의 생각이었다. 그러면서 벽골제와 동시에 이일을 한다면 백성들이 피로할 것이므로 성을 먼저 수축하고 벽골제를 뒤로 미루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벽골제를 먼저 수축할 것을 명하였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왜구의 방비 못지않게 개국 초에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이 급선무였고, 그러기 위해서는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일이 그만큼 중요했던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태종 15년 10월 14일 무인(戊寅); 전라도 도관찰사 박습이 제언을 쌓는 사목(事目)을 올렸다. ‘김제군 벽골제의 수문을 수축하겠으니, 석공(石工) 3명을 보내면 신이 본도 각 고을의 군인을 모아 이 달 20일까지 기초를 닦고 쌓기 시작하겠습니다.’”

이 기사는 1415년 8월에 내린 조정의 명을 시행하는 내용이다. 당시 이에 대한 실행 내용은 『동국여지승람』 김제 고적조에 실려 있는 중수 비문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중수 비문에 따르면, 이 공사는 9월에 기공하여 10월에 완성하였는데 감독은 옥구진병마사(沃溝鎭兵馬使) 김훈(金訓)과 지김제군사(知金堤郡事) 김방(金倣)이 맡았다.

동원된 인력은 각 군의 장정 1만여 명과 일의 실무를 처리하는 300명이었다. 당시에 수축한 벽골제의 모습은 둑 아래의 넓이가 70자, 위의 넓이는 30자, 높이 17자이고 수문은 마치 구롱(丘壟)처럼 보였다고 하였다.

세종 즉위년(1418) 9월 27일 갑술(甲戌); 판청주목사(判淸州牧事) 우희열(禹希烈)이 계(啓)하기를 ‘신이 일찍이 김제 벽골제에 16척의 돌기둥을 좌우로 세우고 그 사이를 널빤지로 가려 막아 저수하였으므로,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나서 제방 둑이 모두 퇴락하였어도 돌기둥은 우뚝 서 있어, 옛날 모습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기사는 세종 대에 이르러 벽골제가 보수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조정에서는 세종 즉위년부터 벽골제를 두고 보수를 해야 한다는 주장과 아예 헐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 논쟁거리가 되었는데, 결론 없이 8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벽골제는 점차 그 기능이 약화되어 갔다.

“정조 13년(1789) 6월 3일, 을미(乙未); 상이 이르기를 ‘벽골제는 길이가 12읍에 걸쳐 있으니, 호서와 호남이라 칭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정조 22년(1798) 11월 30일, 을축; 복태진(卜台鎭)의 상소에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고(故) 처사 유형원(柳馨遠)이 지은 『반계수록(磻溪隧錄)』을 읽어 보니, 거기에 부안의 눌제(訥堤), 임피의 벽골제, 만경의 황등제는 소위 호남의 3대 제언입니다.’”

위의 두 기사는 이미 퇴폐해진 벽골제를 다시 보수할 것을 건의한 내용이다. 복태진벽골제 보수가 12읍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공사이므로 백성들의 힘이 부족하다면 사창제도(社倉制度)를 창설하여서라도 공사비를 충당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1월에는 27명이 상소를 올렸는데 당시 복태진은 상소문에서 “지금 불과 몇 고을의 힘만 동원하여 예전처럼 수선해 놓으면, 노령 이북은 영원히 흉년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상의 예를 든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벽골제는 백제시대 축조된 이래 적어도 네 차례의 큰 증축과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1415년의 공사는 매우 큰 공사였으며, 이후에도 공사가 진행될 때마다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기술적인 문제와 홍수 등으로 제방이 파괴되거나 제방 안쪽에 흙이 쌓임으로써 저수지의 역할이 미미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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