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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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三一運動
영어의미역 1919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정진각

    [상세정보]

    성격 독립만세시위
    발생[시작]연도/일시 1919년 3월 1일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919년 5월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서울
[정의]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되어 경기도 안산 지역까지 확산된 독립만세시위.

[개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그해 5월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확산·전개되었다. 3·1운동의 목적은 민족 자주와 국권 회복에 있었다. 비록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나, 민족사적으로 우리의 독립 의사를 국내외에 평화적으로 알렸다는 점에 커다란 의의가 있다.

[역사적 배경]
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된 후 일본은 독립운동가 검거, 언론 폐쇄, 종교 탄압 그리고 토지조사사업 등의 무단통치를 시행하였다. 1910년대 농민 수는 전체 인구의 약 85%로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일제의 강압적인 무단통치와 봉건적인 수탈, 고율의 소작료, 내외의 부르주아적 계급에 의한 이중삼중의 압박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소작농가는 약 100만 호로 전체 농가의 38%에 달하였고, 자소작(自小作) 농가는 104만여 호로 약 39%였다. 따라서 소작에 묶여 있는 전체 농가는 우리나라 총 농가의 77%에 이르렀다. 당시 소작료 형태는 정조(定租)·잡조(雜租)·타조(打租)가 있었는데, 어느 것이나 수확량의 50~80%를 현물로 바치는 고율의 지대(地代)였다.

소작농들은 고율 현물 소작료 외에도 지세(地稅)와 수세(水稅), 비료대까지 부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여기에 마름[舍音]에 의한 중간 수탈까지 당해야 했다. 또한 농민들이 예로부터 소유해 오던 권리인 도지권(賭地權)·입회권(入會權)·영소작권(永小作權) 등을 상실하였으며, 이로 인해 농민들의 토지 상실과 토지로부터의 이탈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뿐만 아니라 무단적인 식민지 농업정책은 농민들의 농업 경영을 악화시키는 중요 원인이 되었다. 또한 각종 조세 부담이 농민 경영을 곤란케 하였는데, 당시 농민들에게 부과된 조세는 지세(地稅)·호세(戶稅)·부가세(附加稅)·시장세(市場稅)·연초세(煙草稅)·주세(酒稅) 및 기타 각종 조합비 등이었다. 이 결과 1915년 농가 1호당 조세 부담액이 6,082원이던 것이 1920년에는 13,364원으로 급증하였다.

[발단]
1919년 3월 1일부터 약 2개월에 걸쳐 격렬하게 전개된 3·1운동은 민족독립운동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운동을 거치면서 민중은 민족독립운동의 주도세력, 그리고 새로운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다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민중은 근대적 변혁 운동을 성공시킬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민중들의 한계는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전쟁과 그 이후의 의병활동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3·1운동은 많은 수의 민중이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적 민족운동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즉 당시 민중은 민주주의 변혁 운동을 독자적으로 수행할 만큼 역량이 성숙되지 못하였다. 3·1운동이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민중이 주력군(主力軍)의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이 부르주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이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하자 우리 민족 지도자들도 민족의 독립을 대내외에 요구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때 고종이 갑자기 죽자 일제가 독살하였다는 소문이 퍼져 온 국민은 망국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적개심으로 크게 동요하였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서울의 태화관(泰和館)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하여 독립선언문이 낭독되고, 탑골공원에서 학생과 시민들에 의해 독립만세시위가 시작되었다.

[경과]
경기도 안산 지역의 경우 당시 행정 구역상 시흥군과 수원군에 속하였는데, 시흥군에서는 경기도 지역 중 가장 많은 횟수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안산 지역도 도시로부터 점차 농촌 지역으로 파급되며 3월 하순부터 농민이 시위의 주역을 이루었다. 또한 이곳의 시위 주동자들도 특정한 지도사상이나 정치결사체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전개된 운동이 아니라, 각 계층의 민중이 스스로의 사상과 투쟁 방법을 통하여 일으킨 만세운동이었다.

국권 침탈 과정에서 시작된 안산의 수많은 항일 저항정신을 이어온 수암면(秀岩面) 비석거리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30일 오전 10시 구안산치소(舊安山治所)로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 보통학교, 향교 등이 집중되어 있는 비석거리[碑立洞]에 18개 리에서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군자면(君子面) 지역은 장곡리(長谷里) 주민들이 3월 29일, 원곡리와 죽률리 주민들은 4월 4일에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1,000여 명이 시위하였다.

수원군 반월면(半月面) 지역의 만세시위는 4월 1일 반월면 반월장(半月場)에서 600여 명의 주민이 평화시위를 벌였다. 대부도 지역은 대부면(大阜面) 신남리(新南里)에 사는 김윤규(金允圭)·노병상(盧秉相)·홍원표(洪元杓) 등의 주도하에 4월 1일 오전 3시경 집 밖에서 이민(里民) 10여 명과 함께 주막집 앞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장현리(長峴里)의 서당 생도 권희(權憘)와 장곡리(長谷里) 농민 장수산(張壽山) 등은 4월 6일 권희의 집에서 ‘비밀통고’라는 제목 아래 “조선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간의 학정에서 벗어나자!”라는 격문을 쓰고 4월 7일 면내의 구(舊)시장 터로 태극기 하나씩을 갖고 모이라는 사발통문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각 동리에서 차례로 회람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표시한 뒤 이를 동리 구장의 조카 이종영(李鍾榮)의 집 앞에 놓아두어 많은 사람들이 회람하도록 하였다. 또한 장곡리 구장 이덕증(李德增)은 이를 회람한 뒤 월곶리(月串里) 구장에게 전달하였다.

[결과]
안산 지역 곳곳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운동 모의 과정에서 모의 내용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수많은 시위 주모자들이 체포되었다.

[의의와 평가]
안산 지역민들은 3·1운동을 통하여 봉건적인 체제를 뛰어넘는 농민적 의식의 성장과 주체적인 의식의 고양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의 성장과 함께 독립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안산 주민들이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점은 안산 지역 3·1운동의 최대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안산 3·1운동에서 나타나는 운동 양상의 일반적 특징은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여러 형태의 투쟁 방식을 전개해 나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며, 안산 지역민들이 보여준 치열한 투쟁은 식민지 무단통치하에 펼쳐진 생활상의 가혹한 수탈과 민족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독립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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