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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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金瑬
영어음역 Gim Ryu
이칭/별칭 관옥(冠玉),북저(北渚),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문충공(文忠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안산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근호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571년연표보기
    몰년 1648년연표보기
    본관 순천
    대표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아버지는 김여물(金汝岉), 어머니는 함양박씨(咸陽朴氏)로 박강수(朴岡壽)의 딸, 처는 진주유씨(晋州柳氏)유근(柳根)의 딸이다.

[활동사항]
김류는 7~8세에 글자를 익히고 기골이 비범하였는데 어른이 연구(聯句)를 지으라고 하자 곧 ‘군사 소리가 천지를 움직인다[軍聲動天地]’라고 짓자 원대한 그릇이 될 것을 예견했다. 음사(蔭仕)로 침랑(寢郞)[종묘나 능침 등의 참봉이나 령을 지칭함]에 제수되었다가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에 을과로 장원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때 복수소모사(復讐召募使) 김시헌(金時獻)의 종사관으로 호서와 영남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김여물이 전사한 탄금대 아래에서 기생을 끼고 풍악을 벌이고 놀아났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1598년 파면되었다. 얼마 후 충청도 유생들이 김류를 구원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항복(李恒福), 이덕형(李德馨) 등의 변호로 1601년 모함이 풀려 예문관검열로 복직되었다.

이후 대교(待敎), 주서, 봉교 등을 역임했으나 1602년 정인홍(鄭仁弘)이 사헌부를 담당하자 다시 전의 일로 파직되었다. 그 해 봉교로 복직되었고, 1604년 여러 관직을 거쳐 용만수세관(龍灣收稅官)을 역임하였으며, 이어 제수된 전주판관에 재임 중 선정을 베풀어 그 고을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 부교리를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강계부사(江界府使)로 있다가 1614년 대북 정권 아래서 가선대부에 올랐다. 1616년 동지겸성절사(冬至兼聖節使)로 명나라에 갔었는데 역관(譯官) 유지녕(劉智寧)이 궁액(宮掖)[궁에 속해 있는 하인]과 친분이 있다고 횡포를 심하게 부리자 중한 형장(刑杖)을 쳐서 바로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명나라에서 돌아와 보고하던 날 심문까지 당했다.

1617년 북인들로부터 임금도 잊고 역적을 비호한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가 1620년 이귀(李貴) 등과 반정을 꾀하다가 미수에 그쳤다. 다시 1623년(인조 1) 거의대장(擧義大將)에 추대되어 이귀, 신경진(申景禛), 이괄(李适) 등과 인조반정을 일으켰고 그 공으로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곧 병조판서로 승진되어 예문제학을 겸하였다. 같은 해 여름 정헌대부에 올라 양관대제학을 겸하고 동시에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졌다.

1624년 1월 이괄의 난이 발생하자 남행하는 임금을 수행하였다. 난이 평정되자 의정부우찬성으로 옮겨졌고, 1625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1626년 여름 가도(椵島)에 가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찾아가 그의 횡포를 막고 명나라 사신의 반송사(伴送使)가 되어 그들의 불만을 시문으로 회유하여 존경을 받는 등 외교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도체찰사 장만(張晩) 밑에서 부체찰사로 있으면서 먼저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하였다. 환도 후에는 도체찰사가 되어 전국의 군사들을 통솔하였다. 이때 휘하에서 거느리고 있던 포수들을 어영청(御營廳)에 소속시켰으며, 이 해 우의정에 승진되었다. 1628년 봄 유효립(柳孝立)이 모반하자 이를 주도적으로 진압하였고, 진휼상사(賑恤上使)로서 기민 구제에 노력하였다. 한편 군령권을 장악하여 총융사(摠戎使) 이서(李曙), 찬획사(贊劃使) 이경직(李景稷)을 대동하여 여러 산성을 순시하고 그 도형(圖形)을 작성하였다.

1629년 좌의정이 되었고, 1630년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의 추숭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반대 주장을 펴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하였다. 1633년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다가 뒤에 우의정으로 옮겼다. 그러나 다시 정원군 추숭 문제가 제기되자 역시 예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여 강력하게 반대하여 인조의 노여움을 사 이듬해 다시 면직되었다.

1635년 국왕은 전국에 교서를 내려 후금(後金)에 대해 ‘화친을 끊고 방어를 갖출 것’을 선언하면서 김류를 다시 도체찰사로 삼아 청과의 관계 악화 방지에 대비하였다. 그 뒤 곧 영의정에 올라 정권을 장악하는 한편, 도체찰사로서 각 도의 속오군(束伍軍) 2만 명을 정선하여 사전에 대비할 것을 청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임금을 수행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으며, 1637년 강화도마저 함락되자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따라 삼전도(三田渡)에서 성하(城下)의 맹약(盟約)을 맺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637년 5월 기평군(杞平君) 유백증(兪伯曾)이 상소를 하여 공박하고, 이어 양사(兩司) 등에서 삭출(削黜), 파직(罷職), 삭탈(削奪)을 주청하였으나 인조의 비호로 문출(門黜)[성문 밖으로 추방하는 가벼운 벌]에 그치었다. 1638년 특명으로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고, 1644년 3월 심기원(沈器遠)이 반역을 일으키자 신속하게 평정한 공으로 또 다시 영의정이 되어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녹훈되고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가 있던 왕세자의 환국을 주장하였으며, 영춘추관사로서 『선조실록(宣祖實錄)』의 수정을 요청하였다. 홍무적(洪茂績) 등에 의하여 탄핵을 받아 사직했다가 다시 영의정에 복귀하였으며, 이 해 여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을 왕세자로 책정할 것을 주장하고 스스로 세자사(世子師)가 되었다. 1646년 소현세자빈 강씨(姜氏)의 옥사가 있자 이에 반대하다가 사직한 뒤 다시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1647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류는 성격이 엄숙하고 씩씩하며 광명하고 정대하였으며, 겉모습이 호기롭고 시원스러웠다.

[학문과 사상]
김류의 학문은 서인 계열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이(李珥)·성혼(成渾)의 계열을 이어받았으며, 특히 송익필(宋翼弼)을 사사했다. 인조반정에 성공한 뒤 서인이 노서(老西)와 소서(少西)로 갈라질 때 신흠(申欽), 오윤겸(吳允謙) 등과 더불어 노서를 주도하였으나 될 수 있는 한 서인과 남인을 함께 쓰려고 노력하였다. 문장은 기력(氣力)을 숭상하고 법도가 엄격하였으며, 서(書)와 율(律)도 역시 세련되면서도 맑으면서 건실하였고, 글이 또한 기묘하여 공경(公卿)의 비문도 많이 썼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북저집(北渚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와동 광덕산 산록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충(文忠)이고,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1968년에 세운 신도비의 비문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찬술하였고, 글씨는 10세손 김상묵(金商墨)이 썼다. 「김류 선생 영정」은 1991년 11월 2일 안산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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