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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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金誠一
영어음역 Gim Seongil
이칭/별칭 사순(士純),학봉(鶴峯),문충(文忠)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배종석
[정의]
조선 전기 안동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할아버지는 김예범(金禮範)이고, 아버지는 김진(金璡),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로 민세경(閔世卿)의 딸이다. 동생은 김복일(金復一)이다.

[활동사항]
김성일안동부 임하현 천전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났다. 19세에 글을 읽다가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과거 공부만 하고 진리를 깨치기 위한 도학을 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동생 김복일퇴계(退溪) 이황(李滉) 문하에 들어갔다. 이황김성일이 민첩하게 배우기를 좋아하고 마음을 세움이 정성스럽고 절실하다고 칭찬하였다.

29세 때 이황은 요(堯), 순(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공자(孔子) 등 16명의 성현들이 전수한 심법(心法)을 차례로 서술한 「병명(屛銘)」을 전수했다. 1590년(선조 23) 52세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다. 김성일은 일본 체류 중에 왜인들의 무례를 엄격히 따지고 조선 사신의 체모를 강조하였다. 당시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은 “오랑캐와는 겨룰 필요가 없으며 자그마한 예절은 다툴 것이 못된다.”라고 했으나 김성일은 “나라의 체면을 높이고 체모를 중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듬해 귀국하여 황윤길이 병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반해 김성일은 그렇지 않다는 주장을 했다. 이와 같이 정사와 부사의 엇갈린 보고에 대해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은 “황윤길이 돌아와 조정에 보고하기를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김성일은 아뢰기를 ‘그런 낌새를 보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내가 김성일에게 ‘그대의 말이 황 상사와 다른데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어찌할 것인가?’ 했더니, 그는 ‘난들 어찌 왜가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마는 황윤길의 말이 너무 심해 조정과 백성들이 당황하므로 이를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하였다.”라고 수기에 기록하고 있다.

보고한 것과 달리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김성일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김성일은 “한 번 죽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라는 장계를 올리자 선조가 감동하여 서울에 가는 도중에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에 임명하여 다시 영남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귀임 후 초유문을 지어 경상도 내에 포고하고 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을 의병대장으로 삼았으며, 특히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감사 김수(金睟) 사이의 알력을 적극적으로 중재하여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는 데 노력하였다. 공을 인정받아 가선대부의 품계가 내려졌으나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 재임 중 진주 공관에서 병사하였다.

[학문과 사상]
학문 경향의 측면에서 볼 때 김성일이황에게 수학할 당시부터 이기심성론(理氣心性論)에 관해서는 그다지 흥미를 갖지 않았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저술에도 이기심성론에 관한 글은 찾아보기 어렵다. 예컨대 『학봉집(鶴峰集)』에 있는 글들은 대개 시사(時事)에 관한 시(詩)와 문장이며 그나마 학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는 「상퇴계선생문목(上退溪先生問目)」과 「상퇴계선생서(上退溪先生書)」 정도이다.

그 내용은 상장제례의 절차에 관한 세세한 질문이거나 일상적인 문제들의 처리에 관한 질문으로 이론적이거나 사변적인 문제와는 거리가 멀었고 실용적이었다. 예학(禮學)에 있어서 고례와 인정을 중시하는 퇴계 예학을 계승하여 부친상을 당해서는 모든 예절을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행했으며, 『두씨통전(杜氏通典)』, 『구씨의절(丘氏儀節)』, 『향교예집(鄕校禮輯)』 등을 참고해 『상례고증(喪禮考證)』을 지었다. 출사 이후에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경세론 내지 개혁론을 개진하였다.

김성일은 31세에 문과 급제한 후 56세에 진주 공관에서 순직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벼슬길에서 보냈기 때문에 많은 제자를 양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학맥에 내포된 지역적 혈연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였고 대표적인 제자 장흥효(張興孝)의 활약으로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장흥효의 뒤를 이어 이휘일(李徽逸)-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남한조(南漢朝)-류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으로 한말까지 이어지면서 퇴계학파 내에서 최대의 학맥을 형성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학봉집』 16권 10책(원집 7권, 속집 5권, 부록 4권)이 있으며 저술로는 『해사록(海槎錄)』, 『상례고증』, 『조천일기(朝天日記)』, 『기묘일기(己卯日記)』, 『북정일록(北征日錄)』, 『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 등이 있다. 문집은 1649년(인조 27) 이홍조(李弘祚), 김시온(金是榲) 등이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 원집을, 1782년(정조 6) 김주국(金柱國), 이상정(李象靖) 등이 속집을 간행하였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서지리 산75·3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가의대부이조참판에 추증되고, 1664년(현종 5) 신도비가 세워졌다. 1676년(숙종 2)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79년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임하현의 임천서원(臨川書院)·여강서원(뒤에 호계서원으로 개명됨)·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과 경덕사(景德祠), 나주의 대곡서원(大谷書院, 뒤에 경현서원으로 개명됨), 의성의 빙계서원(冰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 안덕현(安德縣)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진주의 경임서원(慶林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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