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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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金長生
영어음역 Gim Jangsaeng
이칭/별칭 희원(希元),사계(沙溪),문원(文元)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고수연

    [상세정보]

    성격 학자|문신
    출신지 서울
    성별
    생년 1548년연표보기
    몰년 1631년(인조 9)연표보기
    본관 광산
    대표관직 동지중추부사|형조참의
[정의]
조선 중기 논산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개설]
김장생송익필(宋翼弼)로부터 예학을 배웠으며,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배워 조선 중기 예학과 성리학의 거두가 되었다.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을 역임하여 요직을 맡지는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영수로 영향력이 매우 커서 인조 초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김장생의 예학은 아들 김집에게 계승되었고, 이후 우암 송시열에게 전해져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에서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가계]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희원(希元)이며, 호는 사계(沙溪).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김호(金鎬)이며, 아버지는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다. 아들은 신독재 김집(金集)이다.

[활동사항]
김장생은 성품이 너그럽고 순박하였으며,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서 덕행군자라 일컬어졌다. 1578년(선조 11)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이 되었으며, 1581년(선조 14)에는 아버지를 따라 종계변무의 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돈녕부참봉, 순릉참봉, 평시서봉사 등의 관직이 내려졌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다가 동몽교관과 인의를 거쳐 정산현감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의 공을 인정받아 종친부전부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1596년(선조 29) 연산으로 낙향하여 거듭 내려지는 관직을 거절하다가 다음 해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이를 행함으로써 군자감첨정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1601년에 조정에서 『주역구결(周易口訣)』의 교정에 참가하도록 불렀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청백리로 올려졌으나,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2)에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그에 관련됨으로써 연좌되었으나 혐의가 없는 것으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로 조정에 나가 사업(司業)으로 옮겨 원자보도(元子輔導)의 임무를 겸하였으나 곧 병으로 낙향하였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 왕이 공주로 파천하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고 난이 평정된 뒤 임금을 따라 서울로 돌아와 원자보도의 일을 다시 맡기도 하였다. 중요한 정사를 논하는 13가지의 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1626년(인조 4)에는 이이성혼(成渾)을 제향하는 황산서원을 건립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로 의병을 모집하여 충청남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으며, 화의가 이루어지자 강화도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형조참의가 되었다. 그러나 한 달 만에 다시 사직하여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게 된다.

[학문과 사상]
김장생송익필, 이이, 성혼 등에게서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특히 송익필의 영향을 받았던 예학 분야를 깊이 연구하여 자신의 아들인 김집에게 계승시켰고 이후 조선 예학의 태두로 평가되고 있다. 김장생의 예학은 양란 이후 혼란해진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아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주장하였던 예론의 이론적 배경은 이이의 이기설(理氣說)로서 이(理)와 기(氣)는 본래 스스로 섞여 있다고 하는 이기혼융설(理氣混融說)을 주장하였다.

김장생이 활동하던 당시는 당쟁과 이괄의 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봉착하였을 때였다. 또한 여러 방면에 누적된 폐단으로 개혁이 필요하였으며, 민생 회복이 절실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상계에서는 기존의 주자학적 전통주의를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김장생은 이념적 체계로서 예(禮)에 주목하였다.

김장생은 예를 실천하기 위해 개인의 수신(修身)을 강조하고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며, 모두 예에 맞게 행동하고 하늘을 우러러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예의 강조는 『가례(家禮)』를 통한 유교적인 가족질서 확립을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으며, 『근사록』 등을 연구하여 당시의 토속과 인정에 맞추어 『가례』를 고치고 보급하는 데 힘썼다.

김장생이 주장하는 예학의 결론은 통(統)을 바르게 하는 것, 곧 정통(正統)이다. 가정·사회·국가에서는 그 나름의 기강과 질서가 필요하고 바르게 서야 하는데 그것의 근간이 통(統)이며 이러한 통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예라는 것이다. 이러한 김장생의 예학론을 중심으로 하는 정통주의 사상은 후에 노론 집권세력의 정치이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김장생의 제자는 아들이자 학문의 정통을 이은 김집이 있으며, 송시열을 비롯하여 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강석기(姜碩期)·장유(張維)·이후원(李厚源)·신민일(申敏一) 등 서인과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모두 김장생 문하의 제자들이다.

[저술 및 작품]
1583년 처음으로 저술한 『상례비요(喪禮備要)』 4권을 비롯하여 『가례집람(家禮輯覽)』·『전례문답(典禮問答)』·『의례문해(疑禮問解)』 등 예와 관련된 저술들이 있다. 또한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경서변의(經書辨疑)』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전서』가 전해지고 있다.

[묘소]
묘소는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으며, 충청남도 기념물 제47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장생의 사후 조정에서 영의정을 증직하였으며, 문원(文元)의 시호를 내렸다. 1717년(숙종 43)에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사계유고(沙溪遺稿)』가 간행되었다. 논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하여 경기도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등 약 10개의 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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