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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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統一新羅時代
영어의미역 Unified Silla Period
이칭/별칭 남북국시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울진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심현용
[정의]
676년부터 935년까지 통일신라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경상북도 울진군의 역사.

[행정구역 개편]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후 685년(신문왕 5)에 영토를 9주(州)로 분할하였다. 이때 동해안 일대를 명주(溟州)[지금의 강릉]로 편제하였으며, 울진을 명주에 소속시켰다. 울진이라는 명칭은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면,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 와서 보배가 많아 울창할 ‘울(蔚)’자와 보배 ‘진(珍)’자를 써서 지명으로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명주의 영역은 북쪽으로 통천, 서쪽으로 안동시 임하와 청송, 남쪽으로 청하에 이르렀다. 757년(경덕왕 16) 전국 주·군·현의 명칭이 개정되었다. 이때 울진은 우진야(현)에서 울진(군)으로 바뀌었으며, 영현으로는 해곡현(海曲縣)을 두었으나, 관할지는 명주 그대로였다.

[신라 하대 상황과 명주장군 김순식]
신라 하대 김주원(金周元)원성왕과의 왕위계승에서 실패하고 명주로 낙향한 후 정부로부터 양양에서 평해에 이르는 일대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즉, 신라 중앙 정부는 786년(원성왕 2) 김주원명주군왕으로 삼고 동해안 일대를 식읍으로 주었던 것이다. 이로써 울진과 평해는 원성왕대[785~798] 이후 김주원 가문의 식읍으로 지배받게 되었으며, 그러한 관계는 이후 그의 후손 4대에 걸쳐 유지되었다.

특히, 신라 말 김주원의 후손인 김순식(金順式)이 명주에서 장군을 칭하면서 그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했으므로 울진·평해도 김순식 세력에 연결되었다. 922년(태조 5)에는 김순식이 고려에 귀부(歸附)하면서 고려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나 울진의 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한 것은 이보다 약간 늦은 듯하다.

930년 왕건(王建)은 고창[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후백제의 군대를 격파하여 승리함으로써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안동을 비롯한 울산 등 동해안 일대 지방세력들은 고려에 항복하였다. 울진도 이때 고려의 한 지방으로 편제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이 울진의 호족들이 고창 전투에서 승리한 후 고려에 귀부한 사실로 미루어 당시 울진에는 명주와는 별도의 독자적인 호족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나말여초의 이러한 상황은 통일신라 경덕왕대 이래 군(郡)이었던 울진이 고려시대에 들어 현(縣)으로 강등되는 배경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토속 신앙과 불교 수용]
불교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고구려에 의해 372년(소수림왕 2)에 수용되었다. 백제는 384년(침류왕 1)에,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눌지왕[417~458] 때 전래되어 527년(법흥왕 14)에야 비로소 국가에 의해 공인되었다.

울진에 불교가 수용된 시기는 구비전승 자료나 사찰 사적기에 기록된 창건 시기와 관련된 자료를 통해 가장 먼저 파악할 수 있다. 불영사를 비롯한 대흥사, 신흥사는 신라 때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대천사는 신라시대에, 청암사·광대사·장재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찰들은 주로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나, 이 사찰들에서는 아직까지 신라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구비전승 자료나 사찰 전래 기록의 경우는 대부분 사찰의 창건 시기를 올려 보고 있어 그 신빙성에 문제점이 많다.

울진의 토속 신앙과 불교에 대한 중요한 단서는 다음의 사료에서 확인된다.

보천은 늘 신령한 계곡의 물을 떠서 마셨다. 만년에 육신이 공중으로 날아 유사강 밖에 이르러 울진국 장천굴에 머물렀다. [보천은] 아침저녁으로 수구다라니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굴의 신이 모습을 드러내어 말하기를 “제가 굴의 신이 된 지 2천년이 되었지만, 오늘에야 처음으로 수구다라니를 들었습니다. 청컨대 보살계를 받고자 합니다”고 하였다. 이미 [보살계를] 받은 다음 날 굴은 또한 형체도 없어졌다. 보천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21일을 머물다가 오대산 신성굴로 돌아와서 다시 50년간 수도를 하였다.[『삼국유사』 권3 탑상4 대산오만진신조]

② 보질도태자는 언제나 계곡의 신령한 물을 마셨는데, 육신이 공중으로 올라가 유사강에 이르러 울진대국의 장천굴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그후] 오대산 신성굴에 돌아와 50년간 도를 닦았다.[『삼국유사』 권3 탑상4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조]

③ 삼산과 오악 이하 명산대천은 나누어서 대사·중사·소사로 하였다. 대사…소사에는…악발[발악이라고도 한다. 우진야군]….[『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조]

위의 사료들은 모두 울진의 대표적인 토속 신앙으로 굴신(窟神)과 산천신(山川神)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토속 신앙들이 어느 시기에 불교라는 중앙 종교에 흡수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사료 ①②는 울진의 장천굴[지금의 성류굴]에 2천년간이나 있었던 굴신이 신문왕의 아들인 보천태자가 와서 수구다라니를 염송하기 전까지는 불교를 전혀 알지 못하다가 보천태자에 의해 보살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한 것을 의미한다. 사료 ③은 우진야군[지금의 울진]에는 악발산에 산천 신앙이 있었으며, 이 산천 신앙이 신라의 국가적인 명산대천제(名山大川祭)에 소사로 편제되어 흡수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후 각 지역의 신앙체계와 토착세력을 왕실과 중앙세력을 중심으로 재편제하고 체계화한 데서 비롯되었다. 즉, 굴신이 불교에 귀의한 후 굴의 형체가 없어져버렸다는 것과 악발산 신앙이 국가적인 제사에 선정되어 국가제도에 흡수된 것은 울진의 토착 신앙체계가 불교 신앙체계로 완전히 흡수되어 토착 신앙을 숭앙하는 재지의 유력한 세력들이 해체되고 약화된 것을 말한다.

보천태자가 울진에 온 시기는 역사적 배경으로 보아 7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명산대천제가 대사·중사·소사로 편제되는 시기는 대체로 685년(신문왕 5) 이후부터 735년(성덕왕 34) 이전으로 보고 있다. 불교가 유입되기 전까지 울진에 강하게 유지되어오던 토속 신앙인 굴신과 산천신은 7세기 말~8세기 초에 신라 중앙세력에 의해 울진에 불교 신앙이 전파되면서 그 체계로 완전히 흡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최근에는 고고 자료에서도 문헌 기록을 방증해주는 유적과 유물이 조사되었다. 울진에서 가장 빠른 시기의 불교 유물은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잘 계승한 9세기 후반의 청암사지 삼층석탑 1기뿐이다.

우리나라에 석탑이 발생한 시기는 삼국시대 말기인 600년경으로 추정되며, 신라의 석탑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634년(선덕여왕 3)에 건립된 분황사 모전석탑이다. 이후 이러한 석탑의 제작은 불교의 전파와 함께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불교가 수도인 경주로부터 울진에 전달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청암사지 삼층석탑은 2006년 경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한 청암사지 발굴 조사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그동안 울진에는 불교와 관련된 발굴 조사가 전혀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고 유물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청암사지 발굴로 금동불상·토기·철마·기와·자기·중국 자기·동전 등의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유물 가운데 소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중판 타날문양의 평기와와 인화문 토기편들은 청암사지의 초축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유물은 수적형문의 인화문 토기편으로 이는 7세기 후반경으로 편년된다. 이로 보아 청암사는 처음 7세기경에는 큰 가람을 형성하지 못하고 작은 암자로 시작했으나, 8세기를 거치면서 발전을 거듭하여 9세기 후반에 와서 석탑을 설치하면서 제대로 된 가람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고고학적 상황은 역사적 상황인 사료 ①②와 맥이 닿아 있다. 울진에는 오랫동안 재지의 토속 신앙이 유지되어오다가 늦어도 7세기 말~8세기 초에 이르러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전파 속도는 빠르지 않았으며, 민간에까지 깊게 보급된 것은 청암사지 삼층석탑이 제작된 9세기 후반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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