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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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吉再
영어음역 Gil Jae
이칭/별칭 재보(再父) ,야은(冶隱),금오산인(金烏山人)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시대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임삼조
[정의]
고려 말 구미 출신의 문신이자 학자.

[개설]
길재는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이색, 정몽주, 권근 등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조선 건국 후에는 친교가 있던 태종 이방원에 의하여 태상박사로 임명되었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거절하고 고향인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으로 돌아가 후학을 가르쳤다. 특히 김숙자에게 성리학을 가르쳤으며, 그 학통은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에게로 계승되었다.

[가계]
본관은 해평. 아버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 길원진(吉元進)이며, 어머니는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된 김희적(金希迪)의 딸이다.

[활동사항]
길재는 11살 때 냉산(冷山) 도리사(桃李寺)에서 글을 배웠으며, 18살 때 상산사록(商山司錄) 박분(朴賁)의 문하에서 『논어』, 『맹자』 등을 읽고 성리학을 접하였다. 또한 개경에서 이색, 정몽주, 권근 등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하며 비로소 학문의 지론(至論)을 듣게 되었다. 1374년(공민왕 23)에 국자감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383년(우왕 9)에는 사마감시(司馬監試)에 합격하였다.

1386년 진사시에 제6위로 급제하여 청주목사록(淸州牧司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이때 이방원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강마(講磨)해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 1387년에 성균학정이 되었으며, 이듬해 순유박사를 거쳐 성균박사로 승진하였다. 공직에 있을 때에는 태학의 생도들이, 집에서는 양반 자제들이 모여 들어 배우기를 청하였다. 1389년(창왕 1)에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이듬해 봄에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으로 돌아왔다.

1391년(공양왕 3)에 계림부(鷄林府)와 안변(安邊) 등의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우왕의 부고를 듣고 채과(菜果)와 혜장(醯醬) 따위를 먹지 않고 3년 상을 행하였다. 어머니를 효성을 다해 봉양하였는데, 아내 신씨(申氏)도 그 뜻을 본받아 옷가지를 팔아서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었다. 군사(郡事) 정이오(鄭以吾)가 이러한 어려운 사정을 듣고 오동동(梧桐洞)의 묵은 밭을 주어서 봉양에 쓰도록 하였다.

1400년(정종 2) 가을에 이방원이 태상박사에 임명하였으나, 글을 올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폈다. 왕은 그 절의를 갸륵하게 여겨 예를 다해 대접하였으며, 집안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1403년(태종 3)에는 군사 이양(李楊)이 길재가 사는 곳이 외지고 농토가 척박해 살기에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오동동의 전원으로 옮겨 풍족한 생활을 하도록 하였으나, 소용에 필요한 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되돌려 보냈다. 그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에 일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학문과 사상]
길재를 흠모하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을 강해(講解)하였으며, 오직 도학을 밝히고 이단을 물리치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후학의 교육에만 힘썼다. 길재의 문하에서는 김숙자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로 학통이 이어졌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야은집』·『야은속집』 있으며, 1573년(선조 6)에는 5세손 길회가 흩어져 있는 시문과 역대 제현들의 찬영(讚詠)을 모아 3권 1책의 목판본으로 『야은선생언행록』을 간행하였다.

[상훈과 추모]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에 향사되었으며,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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