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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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防禦遺蹟
영어음역 bangeo yujeok
영어의미역 defence facility sit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동전
[정의]
조선시대 외부의 침략에 대비해 제주 지역에 축조한 유적.

[개설]
제주 해안 방어의 중요한 목적은 왜구의 빈번한 침입을 막는 데 있었다. 제주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중국으로 가는 길에 위치해 왜구들이 땔감과 물·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왜구는 고려 말부터 제주에 자주 침입하여 방화·약탈 및 인명 살상을 일삼았다. 더구나 추자도 근해에 숨어 있다가 공물 운반선을 약탈하는 등 조선 전 시기에 걸쳐 수없이 침입하여 횡포를 부렸다.

이런 까닭에 제주 방어에 대한 새로운 방안이 모색될 수밖에 없었다. 왜구들의 제주 침범 기록을 통계로 보면, 1316년(충숙왕 3)에서 1556년(명종 11)에 이르는 240년 동안에 30차례가 훨씬 넘는다.

조선시대 제주의 방어시설은 3성 9진 25봉수 38연대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본격적인 제주 방어시설은 이미 고려 말부터 논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1302년(충렬왕 28)에 봉수가 이미 설치되기 시작한 것이다.그러나 본격적인 정비는 조선시대인 1439년(세종 21) 한승순(韓承舜) 목사 때부터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후 중종명종 때의 대대적인 왜구 침략과 임진왜란을 계기로 더욱 강화되었으며, 19세기 이양선이 출몰하던 때까지 계속 정비되어 왔다.

〈표〉제주 방어시설 현황


[3성]
3성(城)은 지방관이 파견되어 행정과 군사 목적을 동시에 갖춘 읍치의 성이다. 조선시대 제주도는 제주읍성·정의현성·대정현성으로 3분되어 있었으며, 읍성은 주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지역에 축조되는 까닭에 평지성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성에는 보편적으로 옹성(甕城)·해자(垓字)·치성(雉城)·여장(女墻) 등의 부대시설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 앞을 다시 두른 성이다. 해자는 성벽 밖을 두른 인공 연못으로 성벽 앞에 설치된 또 하나의 장애물인 셈이다. 그런데 제주 토양은 특성상 물이 잘 빠지기 때문에 물 대신 가시덤불을 채워 넣기도 했다.

치성은 성벽에 달라붙는 적병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끔 성벽 일부 구간을 앞으로 돌출시킨 구조물이다. 여장은 적의 화살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 위에 낮게 세운 담을 말하는데, 복원된 제주의 성벽에는 이것이 하나도 없다.

[9진]
9진(鎭)은 제주의 군사적 요충지에 설치된 화북진·조천진·별방진·수산진·서귀진·모슬진·차귀진·명월진·애월진을 말한다. 본래 진은 변방의 방어를 위하여 북쪽 변방과 남부 해안지대에 구축한 군사 행정구역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특히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주로 남부 해안지대에 많이 설치하였다. 진은 방호소라고도 불린다.

1764년(영조 40)에 그 책임자가 ‘만호(萬戶)’로 승격되었던 ‘명월진’만이 ‘진’이고, 나머지 여덟 곳은 방호소라 불러야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9진의 설치는 이미 태종 때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곳에 성이 축조된 것은 나중의 일이다.

맨 먼저 축조된 진성은 1439년(세종 21) 한승순 목사의 건의에 따라 만들어졌던 차귀진성과 수산진성이다. 이들 두 진 앞에는 차귀도우도가 있는데, 이들 모두 왜구의 거점으로 활용될 우려가 큰 섬들이어서 서둘러 진을 설치했던 것 같다.

1. 화북진성(禾北鎭城)

화북진성은 조선시대 육지와의 관문의 하나인 화북 포구에 있다.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제주의 9개 진성 중에 가장 늦은 1687년(숙종 4)에야 만들어 졌다. 1699년(숙종 25)에 남지훈(南至薰) 목사는 환풍정(喚風亭 : 3칸의 객사)을 건립하였고, 북성 위에는 망양정을 두었다.

화북포가 얕고 비좁아 배 출입이 불편했기 때문에 1734년(영조 11) 김정 목사는 직접 부역을 독려해 길이 약 63m, 폭 6m, 높이 약 4m의 방죽을 쌓기도 했다. 그 위에 영송정을 지어 공사 선박의 출입 검문소로 삼았다. 그러나 김정 목사는 같은 해 9월 객사에서 사망하였다. 방파제 인접한 곳에 관민이 애도의 뜻을 담은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화북진은 동서로 120m, 남북으로 75m 크기이고, 성체는 대략 절반 정도만 남아 있으며, 성문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성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북측 성벽을 바다에 붙여 쌓았다는 특징과 서측 성벽이 잘 남아 있어서 성의 축성 방법을 확인할 수 있다.

2. 조천진성(朝天鎭城)

본래 진성의 축성 연대는 미상이나, 1590년(선조 23) 이옥(李沃) 목사는 출륙하는 사람들이 순풍을 기다리며 머무는 곳으로서, 적 침입의 요충지로서 중요한 포구임을 관민에게 호소하여 농한기를 이용해 성을 축조하게 했다.

2개월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둘레 약 130m, 높이 약 3m의 작지만 짜임새 있는 성을 축조했다. 특히 성을 동북쪽으로 물러 쌓아 그 위에 초루를 세워 객사로 삼고 ‘쌍벽(雙璧)’이라 했다. 1599년(선조 32) 성윤문 목사는 쌍벽정을 중수하여, 북녘에 계신 임금님을 사모하는 뜻을 담아 ‘연북정(戀北亭)’으로 이름을 바꿨다.

현재 연북정은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원형(原型)에 가까운 조천진의 성체와 함께 보존되고 있다. 조천진성은 다른 진성에 비하여 성문이 하나밖에 없고 규모가 작지만 성 주위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독특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3. 별방진성(別防鎭城)

장림(張琳) 목사는 우도가 왜구 침입에 용이하므로 이를 대비하기 위해 1510년(중종 5)에 김녕 방호소를 북제주군 구좌읍 하도리로 옮겨 별방진을 설치하고, 둘레 약 724m, 높이 약 2m의 성을 쌓았다. 동·서·남문에 각각 1칸짜리 초루가 있었다.

별방진제주목 동쪽 끝에 위치한 진성으로서, 특별 방어가 필요했기에 이름도 ‘별방’이라고 지어졌다. 9개 진성 중 명월진성 다음으로 크며, 북동쪽 성벽은 성안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게 축조되었다. 도내 9진 가운데 비교적 성곽이 많이 남아 있어, 제주도 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1996년에 남쪽 성곽 일부를 보수하였다.

4. 수산진성(水山鎭城)

수산진성은 도 안무사 한승순의 건의에 의해 1439년(세종 21)에 둘레 약 350m, 높이 약 5m 규모로 9개 진성 중 가장 먼저 축성됐다. 이경록(李慶祿) 목사가 임진왜란 때 성산 일출봉을 천혜의 요새라 판단하고 진성을 성산일출봉 인근으로 옮기면서 폐성됐다가(1597년) 1599년(선조 32) 성윤문 목사가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았다.

수산진성은 동서 134m, 남북 138m가 넘는다. 수산진성은 성체 대부분이 원형대로 남아 있으며, 성담은 현재 수산초등학교 교사(校舍)와 운동장 돌담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성(東城) 한 부분에는 ‘진안할망당’이라는 신당이 있다.

성을 축조할 때 돌담이 자주 무너져 내려 사람들이 죽고 다치자, 13세 어린 소녀를 재물로 바쳐 성담과 함께 묻자 진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소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설치한 당(堂)이 바로 ‘진안할망당’이다.

왜구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섬 주위에 돌성을 쌓아야 했던 도민의 어려움과 고통을 환기시켜준다. 성 구조와 관련해서는 북쪽 성벽 전 구간에 남은 높이 45㎝의 여장과 남쪽 성벽 앞의 자연 해자, 그리고 치성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5. 애월진성(涯月鎭城)

애월진성은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들어와서 관군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목성(木城)을 방어시설로 사용하다가, 1581년(선조 14) 김태정 목사가 애월 포구 가까이에 돌로 성을 쌓아 진을 옮겼다.

석성(石城)은 둘레 약 166m, 높이 약 2m이며 남·서 두문에는 문루를 두었고, 객사와 무기고 등이 있었다. 현재 바다와 접한 북측 성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미석(楣石)·총안(銃眼)·회곽도(廻廓道)·여장(女墻) 등이 남아 있어 당대 해안성의 방어 성격을 파악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남측 성벽은 복원하였으나, 당대의 성벽인 북측 성벽과는 축조 방법의 차이를 보인다.

6. 명월진성(明月鎭城)

명월진성은 조선 1510년(중종 5)에 장림 목사가 비양도 인근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목성(木城)으로 축조했다. 급박했던 정세 때문에 나무로 서둘러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통나무를 엮어 세운 담장, 즉 목책(木柵)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1592년(선조 25)에 이경록 목사에 의해 돌로 바꾸어 쌓았으며, 둘레가 약 915m, 높이가 약 2m이다.

성 안에는 풍부한 양의 감천(甘泉)이 있었고, 동·서·남문 위에는 1칸씩의 초루를 두었다. 제주목 서부의 중요 진지였기 때문에 1764년(영조 40)에는 조방장을 승격하여 만호를 두고, 제주 출신을 임명하도록 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성벽은 동문과 남문 사이 120m의 외벽 성석(城石)이며, 각 문에 있었던 옹성(甕城)은 동문 쪽에 외벽만이 남아 있다. 제주도기념물 제29호로 지정되었다.

7. 서귀진성(西歸鎭城)

서귀진성은 본래 해변가 홍로천 위에 있었는데, 1590년(선조 23) 이옥(李沃) 목사가 서귀포구 동쪽으로 옮겨왔다. 성 밑 포구는 넓고 암벽으로 자연 방풍이 되어 있어 수백 척의 선박을 감추어둘 수 있었다.

그러나 진(鎭) 주변에 사람이 살지 않았으므로, 폐목장을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감세 조처하여 진 주위에 살도록 했다. 또 정방폭포의 상류 물을 끌어와서 식수와 농사에 이용하게 했다. 현재 옛 서귀진 터에 민간시설이 들어서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8. 모슬진성(摹瑟鎭城)

1676년(숙종 2)에 윤창형(尹昌亨) 목사가 동해 방호소를 옮겨서 축성하였다. 3면이 바다이므로 뭍 쪽으로 성문 하나만 두었다. 따라서 성 안에는 물이 없어 성 밖에 있는 ‘신영물’을 이용하였다. 둘레는 100m,이고 높이는 약 4m였다. 모슬포항 개발로 부근이 매립돼 개인 주택이 들어서면서 진터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9. 차귀진성(遮歸鎭城)

차귀진성은 고려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23년까지 원나라 목마(牧馬) 관리자인 목호가 말을 기르기 위해 서아막(목축관리소)을 설치했던 곳이다. 1652년(효종 3) 이원진 목사가 차귀도를 의지 삼아 침략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진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다.

성 둘레는 약 360m이고 높이는 약 3m이다. 처음엔 여수(旅帥: 약 125명의 병력)를 두었으며, 조방장을 거쳐 만호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조방장으로 환원하였다. 현재 성의 윤곽은 찾아보기 힘들다.

[봉수와 연대]
제주의 봉수는 25개소, 연대는 38개소가 있었다. 봉수는 봉(烽, 횃불:밤)과 수(燧, 연기:낮)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시설이다. 군사 목적으로 봉수를 사용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제주에서 봉수와 연대 시설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본격적인 군사적 통신 시설로 사용된 것은 조선 세종 때의 일로 보인다.

당시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은 “봉화 후망(候望)은 22개소이고, 봉군은 봉화마다 5명이며, 연대의 규모는 높이와 너비가 각 10척”이라고 조정에 보고했다. 또 1702년(숙종 28)에 부임한 이형상 목사는 『남환박물』에서 제주에 “봉수와 연대가 63곳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봉수와 연대는 1895년 봉수제가 폐지될 때까지 위치와 숫자를 달리하면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군사적 통신수단의 구실을 하였다.

1419년(세종 원년) 거화거수법(擧火炬數法)은 평시에는 1개, 황당선(荒唐船)이 나타나면 2개, 지경에 가까이 오면 3개, 지경을 범하면 4개, 접전하게 되면 5개를 올리는 5거법을 채택했다.

밤에는 횃불을 밝히고, 낮에는 연기를 피웠으며,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려 불이나 연기로 통신이 불가능할 때는 봉군이나 연군이 달려가서 연락을 취했다. 봉수와 연대의 주변 백보 내에는 봉화의 오인을 막기 위해 무당이나 통속적인 잡신제를 절대 금하였다.

봉수는 일반적으로 보다 높은 곳에서 약 20㎞ 밖의 먼 곳을 감시하던 시설이라 해안에서 조금 산 쪽으로 들어온 오름 위에 위치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오름 정상에서 위쪽으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 그 위에 불을 피웠고, 밑에는 불의 번짐을 방지하기 위해 물을 채워놓을 수 있는 이중 도랑이 있는 구조였다.

반면 연대는 네모지게 돌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주로 다가오는 배가 적선인지 혹은 표류선인지를 현장에서 확인해야 했기 때문에 주로 해안 가까운 언덕에 만들어 졌다. 이처럼 연대는 현장성이 강조되기 때문에 봉수보다 숫자 면에서도 많을 수밖에 없다.

높이와 크기와 시설에 대한 규정이 법으로 마련되어 있었지만 제주도 연대의 경우 규모에 있어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치는 대개 해안의 높은 지대에 방형으로 축대하였다.

각 봉수에는 6명의 별장과 12~36명의 봉군이, 연대에는 6명의 별장과 12명의 연군(혹은 직군)이 배치되었다. 별장 2명과 봉군(연군) 4명 내지 12명이 1조로 구성되어 3교대로 근무했다. 봉수 교신 관계는 다음과 같다.

(제주성 관할) ⇔ (명월진) 만조봉수 ⇔ (명월진) 도내봉수 ⇔ (애월진) 고내봉수 ⇔ (제주성) 애월읍 수산봉수 ⇔ (제주성) 도원봉수 ⇔ (제주성) 사라봉수 ⇔ (제주성) 원당봉수 ⇔ (조천진) 서산봉수 ⇔ (별방진) 입산봉수 ⇔ (별방진) 왕가봉수 ⇔ (정의성 관할) ⇔ (수산진) 지미봉수 ⇔ (수산진) 성산봉수 ⇔ (수산진) 성산면 수산봉수 ⇔ (정의성) 독자봉수 ⇔ (정의성) 남산봉수 ⇔ (정의성) 달산봉수 ⇔ (정의성) 토산봉수 ⇔ (서귀진) 자배봉수 ⇔ (서귀진) 예촌봉수 ⇔ (서귀진) 삼매양봉수 ⇔ (대정현 관할) ⇔ (대정성) 구산봉수 ⇔ (대정성) 호산봉수 ⇔ (대정성) 저별봉수 ⇔ (모슬진) 모슬봉수 ⇔ (차귀진) 당산봉수 ⇔ (제주성 관할) ⇔ (명월진)

[제주성곽의 형태와 축조공법]
제주성곽은 고려시대 축성된 항파두리 토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석성이다. 석성의 축조는 흙이나 목재로 축성하는 것보다는 많은 공력이 들지만, 자연적으로는 석재 확보가 쉽고, 성곽이 견고하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성곽은 평지성으로 지형에 따라 세분하면 대부분은 해안에 위치한 해안성이다. 내륙성에 속하는 것으로는 정의읍성·대정현성·차귀진성·수산진성이 있고, 해안성으로는 제주읍성·화북진성·조천진성·별방진성·애월진성·명월진성·서귀진성·모슬진성이 있다.

이와 같이 해안성이 많은 것은 제주도가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며, 해안성은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인 기능이 많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제주도 성곽 중 조선 초기에 축조된 것은 내륙성 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반면에 조선 중기에 이르러 축조된 성곽은 해안성에 원형 혹은 타원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제주의 성곽은 제주도 현무암을 치석(治石)한 후 허튼층쌓기로 축조 하였고, 축조는 대부분 협축 공법을 사용하였다. 성곽은 외벽의 기울기에 따라 성벽의 안정성과 방어능력이 크게 달라진다. 즉, 경사비율이 적으면 성벽이 완만하여 안정성이 있으나 방어력이 감소되고, 경사율이 크면 급경사가 되어 방어력은 있으나 안정성이 부족하여 붕괴의 우려가 커진다.

제주의 성곽은 성벽의 외벽 기울기가 대부분 직선형이고, 단경사를 이루고 있다. 즉, 제주 성곽의 성벽을 일정한 경사비율에 따라 성벽 하단부터 상단까지 쌓아 올렸다. 따라서 제주의 성곽은 안정성보다는 방어능력에 중점을 두어 축조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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