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기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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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鐵器時代
영어음역 Cheolgi sidae
영어의미역 Iron Age
이칭/별칭 청동기시대 후기,철기 시대 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선사/철기
집필자 강창화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를 이어 나타나는 철기를 도구로 만들어 사용한 시대.

[개설]
철기 시대는 크게 둘로 분류된다. 그것은 초기 철기 시대[청동기 시대 후기, 철기 시대 Ⅰ]와 원삼국 시대[철기 시대 Ⅱ, 삼국 시대 전기]로 구분된다.

초기 철기 시대는 기원전 3세기경 한반도와 중국 북방 지역과의 철기 문화 접촉에서 출발한다. 철기의 출현은 중국 하북성 북부에 자리한 연(燕, B.C.323-222)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이 전래된 때와 같은 시기이다. 명도전이 출토된 유적에서는 중국제 철제 무기·농기구·공구가 보임에 따라 이 시기에 철기가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는 철기가 보급되면서 단단하고 예리한 철제 도구를 이용하여 농경이 대규모로 이루어면서 농업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 생산력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다. 또한 광석의 채굴에서 제련·제조에 이르는 공정에는 대규모의 집단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집단이 생겨나고, 사회 내에는 계급 분화가 더욱 촉진되었다.

전쟁의 형태도 이제까지 짧은 무기를 이용한 보병전에서 긴 철제 칼과 말을 이용한 기마전으로 바뀌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중국의 진(秦)·한(漢)이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철기를 바탕으로 한 군사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원삼국 시대는 역사학자들에 의해 삼한 시대·부족국가 시대·성읍국가 시대로 불리고, 고고학자들에 의해 김해기·웅천기·삼국 시대 전기로 불린다. 특히, 김원룡은 이 시대를 삼국 시대의 원초기, 원사 단계의 삼국 시대라는 개념에서 원삼국 시대라는 용어로 정리하였다.

이 시대에 보이는 한반도의 특징은 몇 가지로 정리된다. 그것은 청동기의 완전 소멸·철기 생산과 보급·도작 문화의 발전·고인돌의 소멸·귀족묘로서의 목곽묘와 대형 석곽묘의 출현·새로운 도질 토기의 출현으로 요약된다.

이 시기의 주거 입지는 강변 평야를 내려다 보는 자연 구릉상의 대지에 위치한다. 그 유형은 지상화·맞배 지붕·온돌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토기의 특징은 재래식 그릇으로 노천·개방요에서 산화염(700~800℃)으로 구워 낸 적갈색의 연질 토기가 대량 생산되고 지역색을 나타낸다. 반면에, 개량형 그릇으로 간단한 밀폐 가마에서 환원염(1000~1100℃)으로 구워 낸 회색 또는 회청색의 경질 도기가 만들어진다. 이 토기는 간단한 돌림판을 사용하고 있고 무늬판(도장)을 사용하여 그릇 표면을 타날하였으며, 물기가 스며들지 않는 석기질 계통이다.

이 토기는 김해식 토기와 와질 토기로 분류된다. 김해식 토기는 김해 지방 패총을 중심으로 출토된 토기로 항아리형 생활용 그릇이며, 한반도 전역의 공통 토기로 정리된다. 와질 토기는 일반적으로 전시기의 검정 토기를 이은 무덤 부장용 그릇으로 사용된다.

이 시대의 사회적 성격은 초기 국가 체제의 성립 시기로서 왕권·율령·관료 체제·징수·징병·방어 시설·도로망·교역·무역·철기·소금·쌀의 통제 등이 이루어지는 초보적인 단계로 보인다. 크게는 다음 시기인 완전한 국가 체제로 이어지는 소국 단계의 체제로 인식되어왔다.

[취락의 형성]
기원후 2세기경 제주도는 취락과 거점 취락, 읍락과 읍락간의 관계, 국읍의 형성에 초점이 맞춰진다. 큰 마을의 형성을 알리는 용담동 유적과 삼양동 유적은 대체로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유적으로 점토띠 토기와 송국리형 토기가 함께 유입되었다. 삼양동 마을의 주거 형태와 송국리형 토기는 상모리식 토기를 사용하는 토착 집단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세력 집단이며 제주도산 토기 형식의 변화에서 삼양동식 토기는 기원후 1세기를 초출 시기로 하는 곽지리식 토기 이전 단계에 해당된다.

삼양동 유적 안에는 크고 작은 움집·창고·저장공·야외 토기 요지·조리 장소·노지·마을 공간을 구획한 경계 석축과 배수로·폐기장·패총·고인돌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주거지는 모두 합하여 236기이다. 이중 원형 움집 173기·장방형 대형 움집 17기·부정형 주거지 18기·지상식 가옥 중 불다짐 처리된 주거지 20기·창고지 8기이다.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규모를 합하면 실제 규모는 현재보다 3배 이상이 된다.

이들 자료들을 대략적으로 분석해 보면, 크게 상모리 3단계 시기와 삼양동 2·3차 시기[기원전 2~1세기]의 주민 집단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삼양동식 토기 사용 집단은 송국리형 집자리를 채택하고 있으며, 삼양동식 토기 초기 단계는 화강암 태토의 원형 점토띠 토기와 공반하고 있다. 특히, 원형 점토띠 아래에 꼭지형 파수가 달린 토기는 적어도 기원전 2세기 중반을 하한으로 한다. 이러한 원형 점토띠 토기는 종달리에서 삼양동으로 이어지는 제주 동북부 지역에 한정하여 분포하고 있다.

삼양동 마을과 같은 규모의 취락이 모여 중심적 기능이 강화되면 읍락의 읍이 되고 더욱 발전하면 국읍이 된다고 볼 수 있다. 1~2세기경 고대 삼양동 마을은 적어도 읍락 정도의 규모가 된다.

삼양동 마을보다 더 큰 마을의 증거는 2세기경에 한천 서쪽 평탄 대지에 자리한 용담동을 중심으로 나타난다. 용담동 마을의 위상은 유물 산포지의 범위가 수만 평에 이르는 마을 공간의 규모, 고인돌군의 무게, 축조 기술의 우수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크게 보면 이 일대가 읍락의 읍이 자리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최근 용담동 일대의 건축 민원에 따른 조사가 진행되면서 한천 서편 50m 지점에서 확인된 용문로 유적에서 송국리형 주거지가 확인되었고, 용담동 6호 고인돌 남쪽에 자리한 주차장 부지에서 길이 5m 이상 되는 대형 원형 주거지 군락, 월성 마을 인근에서 반경 10m 이내에 5기 이상의 원형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각 지점을 연결하면 대략 300,000㎡ 이상의 규모의 대형 마을터가 확인된다. 이 마을 면적은 고대 삼양동 마을의 150,000㎡와 비교하면 2배 이상이 된다. 따라서 이곳 용담동 일대에 큰 거점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제시해 주고 있다.

탐라국으로의 이행은 우선 국읍의 지배층의 존재를 찾아야 한다. 이런 증거는 1985년에 발굴된 용담동 적석 묘역 목곽묘의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묘제는 위석형 병풍식 고인돌[용담동 6호]과 동일한 시기에 축조되었다.

2~3세기경[삼양동 4차 시기]에 있어서 용담동·삼양동·외도동 마을의 비교 우위 분석이 가능하다. 즉, 삼양동 마을과 외도동 마을은 읍락 단계로 추정되며, 이보다 큰 마을인 거점 마을은 용담동 마을일 가능성이 크다.

한천변 용담동 일대의 거점 마을의 등장, 국읍의 형성과 관련된 자료는 용담동 무덤의 부장품에서 나타난다. 즉, 철제 장검·단검·창·도끼·화살촉·유리 구슬 등의 세트화된 중국 한나라 제품 등이 주목된다. 이 용담동 철기 부장 묘역은 부산 노포동 유적과 최근 김해 양동리 유적 출토 소용돌이 문양 장식 철검과 삼각형 만입편평 철촉의 연대가 2세기 중반 이후로 잡고 있어 비교가 된다.

용담동 목관묘역은 선대의 공렬 토기 집단의 석곽묘 묘역을 보호하여 선대의 토착 집단을 계승하는 양상을 보여 준다. 그렇다면 용담동 묘제와 삼양동의 마지막 시기의 상황을 고려하고 최근 조사된 외도동 유적의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추정해 보면, 용담동 목관묘 피장자는 전쟁이나 갈등의 정리 과정에서 등장하는 2~3세기대 국읍의 수장일 가능성이 크다.

토기 집단으로 보면,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토착적인 제3단계 말기 공렬 토기 집단[재지 집단], 송국리 문화의 계보를 계승한 이질적인 삼양동식 토기 집단[외지 집단], 새롭게 등장한 철제 무기를 소유한 곽지리식 토기 사용 집단[신흥 외지 집단]이 혼재할 가능성이 있다. 결국, 말기 공렬 토기 집단은 자연스럽게 곽지리식 토기 집단에 흡수·통합되었고, 삼양동식 토기 사용 집단은 그들 세력에 의해 밀려나간 상황을 용담동 묘역이 설명해 주고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사실이지만 탐라국이 형성될 당시에 제주도 지역은 일도·이도·삼도 등 3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여기에서 제주도에 등장하는 첫 정치·사회 조직은 이질적인 3개 집단과 문화가 통합되어 이루어졌음을 추정해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점들은 탐라국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마을과 읍락, 거점 읍락과 국읍의 탄생이라는 시간·공간적 범위로도 볼 수 있다.

[탐라국의 성립과 발전]
탐라 성립기의 특징을 살펴보면, 주거 양상에서 기존의 장방형 또는 방형계 주거형[용담동 월성로 유적, 삼양동 초기 단계 등]과는 다른 원형계의 송국리형 주거지가 출현한다. 취락의 규모면에서 보면, 상모리·김녕리·용담동 등의 소규모 취락 단계에서 이 시기가 되면 삼양동용담동 등에 비교적 규모가 큰 취락이 형성되는 단계에 해당한다.

토기 조합상에서 보면, 기존의 민무늬 토기[공렬계 토기, 각목계 토기 등]와 차이를 보이고 있고 후행하는 곽지리식 토기와도 다른 양상을 보이는 시기로, 직립 구연 토기·점토띠 토기·삼양동식 토기 등이 중심 토기이다. 묘제상에서도 이 시기에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축조되고 있다.

대외적 상황을 살펴보더라도 산지항삼양동 유적 등에서 외부와의 직·간접적인 교역이 활발했음을 보여 주는 대외 교류 유물이 다량 확인되고 있다. 계층 구조에 있어서도 옥환·동검·동촉 등 권위를 상징하는 위신재와 각종 장신구류 등 계층 구조의 불평등화를 시사하는 유물이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 시기의 초기에 유구 석부 등의 석기 사용도 꾸준히 증가하게 되지만, 후기에 새로이 철기가 등장하게 된다. 이 철기는 삼각형 점토띠 토기 문화의 영향으로 유입된 것으로 보이나 소형 철도자편 등 소량에 불과하며 다음 단계인 탐라 전기에 들어서서 철기의 유입과 사용이 증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탐라 시대 전기[200~500년]의 특징을 살펴보면, 제주 전역이 곽지리식 토기 문화권으로 단일화하며, 종달리곽지리 등에 대규모의 패총이 등장하게 된다. 새로운 유력 개인묘인 철기 부장의 적석목곽묘가 출현하며 철기의 집중화 현상이 나타난다. 용담동 철기 부장묘의 철제 유물 세트는 탐라 성립기에 진행된 계층 구조의 불평등화가 심화되는 최고조의 과정에서 등장한 지배 계층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유적수가 급증한다. 이는 인구수의 급격한 증가로 연결되며, 소규모 취락이 증가하게 되고 확대되는 일련의 사회 변동 과정에서 중심 취락의 기능과 역할이 더욱 높아지게 되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 고인돌의 경우, 전시기에 비해 축조 형태의 우월성을 보이는 축조 기술상의 발전이 진행된다. 즉, 이청규 분류 1~3단계보다 더욱 발전된 형태인 5~6형식의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축조된다. 이는 노동력의 집약화가 강화되고 지배층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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