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북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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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珍島-
영어음역 Jindo Bungnori
영어의미역 Jindo Drum Performance
이칭/별칭 진도북춤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생활·민속/민속
유형 작품/민요와 무가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집필자 이윤선

    [상세정보]

    성격 민속춤
    문화재 지정번호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8호
    문화재 지정일 1987년 9월연표보기
[정의]
북을 어깨에 맨 채 양손에 채를 쥐고 추는 국내 유일의 양북춤

[개설]
진도북춤은 흔히 ‘북춤’과 ‘북놀이’로 혼용해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굳이 분류하자면, 군무를 중심으로 북을 메고 추는 춤을 북놀이라 하고 독무를 중심으로 북을 메고 추는 춤을 북춤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만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 북놀이로 지정되었으므로 ‘북놀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있다.

진도의 북은 양손에 채를 쥐고 친다고 하여 흔히 ‘양북’이라고도 하고 채를 쌍으로 들고 춘다고 해서 ‘쌍북’이라고도 한다. 혹은 어깨에 메고 친다고 하여 ‘걸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대개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양손에 채를 쥐고 친다는 의미의 ‘양북’이라는 용어로 통칭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다.

진도북춤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들노래에서 보이는 ‘모방구’ 혹은 ‘못방구’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풍물(농악)의 북놀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대표적이다.

다른 지역의 풍물을 예로 든다면, 장고가 ‘설장고’ 등으로 농악에서 분화·발전한 것처럼 북춤이나 북놀이는 독자적인 춤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는데, 진도의 경우 명인들에 의해 북춤과 북놀이로 발전했다고 한다.

유래설 중에는 풍물에서 장고 대신 북을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이는 장고 구입이나 제작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고는 왼쪽 피와 오른쪽 피를 각각 개가죽이나 소가죽 등 다른 가죽을 사용해야 하고, 원철, 구철, 진흥사 등의 특수 부품이 필요한 악기이다. 따라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북통과 북을 장구 대신으로 연주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가락 자체가 장구가락을 대신하는 잔가락을 많이 사용한다.

[생활민속적 관련사항]
진도에서의 북은 설북이라고 하는데 설쇠가 풍물을 리드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모내기 등의 들노래에서는 설북이 지휘자의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진도 씻김굿에서 징이 지휘자의 역할을 하고, 걸궁 농악에서 설쇠가 지휘자의 역할을 하는 것에 견주어볼 수 있다.

따라서 모내기 등의 들노래에서는 징과 꽹과리는 따라붙지 않아도 북은 필수 악기였다. 이때 북수는 큰 삿갓을 쓰고 삿갓 끝이 물에 닿을 정도로 완만하게 곡선을 그리며 춤을 춘다. 또 북채를 지휘봉 삼아서 못군들을 지휘하는데, 흥을 돋우는 것은 물론이고 이 빠진 모나 줄 틀린 모를 지적하는 역할도 담당한다.

진도북(북춤이나 북놀이의 북)의 형태를 보면, 소리북보다 약간 작고 가벼운 것이 특징이다. 또 다른 지역의 풍물북보다 매끄럽고 정교하다. 보통 소가죽을 북틀에 못질해서 만드는데, 소리북이나 용고처럼 직접 못질을 하는 게 아니라 소가죽줄로 X자로 매서 가죽을 고정시킨다. 또한 통나무로 된 오동나무나 미루나무의 중앙 부분을 파서 여기에 소가죽, 말가죽 등을 대서 북을 만든다. 대개 진도 이외의 지역에서 풍물북에 옆줄을 강하게 조이기 위한 쐐기를 박아 넣는데 반해, 진도북은 쐐기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북의 구입이 자유로워진 현대에 와서는 이런 경향들이 무시되기도 한다.

또한 1980~1990년대의 양태옥이나 박관용의 경우, 소리북을 메고 북춤을 추었기 때문에 진도북의 형태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북춤을 출 때 흔히 매구굿 등의 걸립에서 사용하던 담배꽃 고깔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후 북춤이 변화를 겪으면서, 특히 박병천 등에 의해 상투머리나 머리띠 등을 사용하는 예가 많아졌다.

[현황]
진도북의 명인들은 무수히 많다. 그만큼「진도 북놀이」는 광범위한 예술적 인프라를 형성하고 있다. 조선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김행원(金行元)[1878~1935], 진도읍 출신, 고법 예능보유자 김득수(金得洙)의 부친)이 북춤이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김행원은 호남 일대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다고 전해진다. 흔히 다섯째 아들이라는 뜻으로 ‘오바’라고 불린다.

이외에 김기수(金基洙), 김성남(金成南), 임장수, 박태주 등의 북수들이 이름을 떨쳤다. 이중 소포리박태주는 북을 잘 쳤다는 의미에서 흔히 ‘북태주’라고 불렸다. 진도에서 최초로 고법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던 김득수의 경우도 일명 ‘오바’로 알려진 부친의 예술적 기질을 타고 태어나 명인의 반열에 올라섰다.

진도북춤이 중앙에까지 널리 알려진 것은 1983년에 문화재위원인 정병호(鄭炳皓)가 도깨비굿을 조사하기 위해 진도에 들렸다가 의신면 청룡리의 노인들이 북춤을 추는 것을 보고 중앙에 적극 홍보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이때 진도의 설북이 양손에 채를 쥐고 치는 양북이라는 점이 알려지면서 점차 중앙에서의 북춤 공연이 성행하게 되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진도북춤’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람이 정병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한 학자가 계기를 마련한 것일 뿐, 진도북놀이의 본래 맥락은 진도의 선조들이 끊임없이 연마하고 노력해 계승해 온 진도 사람들의 예인정신의 산물임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진도 북놀이」의 전통은 꾸준하게 진도의 들노래판과 풍물판에서 전승되어 왔는데, 이름 난 북수 치고 명언을 남기지 않은 사람이 없다. 양태옥은 “북을 치려면 양태옥이만큼 쳐라”라는 말로 유명하며, 곽덕환은 “다듬이질 사위가 일품이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박관용 또한 춤사위가 유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북을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들이 점차 생겨났는데, 양태옥(梁太玉)[1919~2003], 군내면 정자리 출신), 장성천(張成天)[1923~1993], 임회면 석교리 출신), 박관용(朴寬用)[1921~ ], 진도읍 출신), 곽덕환(郭德煥)[임회면 상만리 출신], 박병천(朴秉千)[지산면 인지리 출신] 등이 선조들의 기예를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이들의 뒤를 이어 이름을 날린 사람들은 대개 본명보다 속명으로 알려졌는데, 조도 꼴기미의 최우물, 포산의 돌무채, 해남 옥동의 꼭지바 등이 그들이다. 또 삼당리의 김길선은 장성천의 뒤를 이어 북놀이 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소포리의 김내식은 일명 ‘북태주’의 북춤 사위를 가장 비슷하게 모사하는 북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이외에도 북놀이 보존회를 이끌었던 많은 북수들을 포함하여 마을마다 한 명 이상의 명인들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도북춤은 다양한 가락과 춤사위를 곁들인 놀이이자 춤으로 연행되어 왔다. 그러나 1987년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면서 일정한 틀을 강요받게 되었다. 또한 장성천, 양태옥, 박관용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 일종의 유파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박병천은 북춤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서울의 집(코리아하우스) 악장 시절, 진도의 기교적 춤사위를 곁들인 진도북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인정받았다. 양태옥은 14세 때부터 김행원에게 북춤을 이어받았고, 박관용과 장성천소포리박태주에게서 북춤을 전승받았다고 한다. 박관용은 유년시절을 소포리에서 보냈으므로 직·간접적으로 박태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박병천은 양태옥에게 사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진도의 자유스럽고 구성진 북춤의 전통을 도제식 계보에 따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재단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이처럼 「진도 북놀이」는 역사와 전통 속에서 연행되어 오다가 문화재 지정기를 지나면서 조직화되기 시작하는데, 1984년 2월 16일에 창립된 진도북놀이보존회의 창립이 그 시발점이 된다.

초창기 「진도 북놀이」보존회는 장성천(張成天)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1984년 10월 25일 국립극장에 초청되는 등 전국적인 공연행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1985년 제7회 명무전에는 진도북춤이라는 이름으로 박관용과 한순자(韓順子)가 출연하였다. 같은 해인 1985년에는 양태옥(梁太玉)[1918~ ], 군내면 정자리)이 전국 국악기악부문 경연대회인 제3회 신라문화제에서 수상하였다. 이어 1987년 9월에는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로「진도 북놀이」와「진도 만가」가 지정되었다. 북놀이 예능보유자로는 장성천, 양태옥, 박관용이 지정되었고, 만가 예능보유자로는 설재복, 김항규가 지정되었다.

이런 상황에 발맞추어 시야를 전국적으로 돌리던「진도 북놀이」기능보유자들은 후학을 양성하고 연구하는 데 힘을 쏟는다. 1987년 박관용이 의신면 진설리에 북춤연구원을 연 것도 이런 사례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박관용은 1984년 8월 호남농악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최우수상을 받았다. 또한 1987년 5월 전주대사슴경연대회에서 북춤으로 입선을 하였고, 1984년 광주에서 열린 전국예술제 무용부문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1985년 제14회 남도문화제 북춤 개인 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때는 광주 북동에 무용학원을 열어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1979년 서울예고 8회 명무전 출연을 비롯해 1984년 서울예술제에서 북춤을 발표했고, 같은 해 서울국립극장의 명무전에 출연하였다. 1985년에는 서울국립극장에서 북춤 발표회도 가졌다. 박관용의 북춤은 지산면 소포리박태주의 대를 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후 지산면 인지리의 조태홍의 춤가락을 곁들였다고 한다. 박관용의 북춤은 느린 살풀이, 중머리, 당악, 휘몰이까지 정연한 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태옥은 1988년 3월 1일, 광주에 전수학원을 차렸다. 이곳에서는 진도북춤뿐만 아니라 타악, 법고, 관악, 현악 등의 다양한 악기를 학습시켰는데, 특히 사물놀이, 북가락, 대금, 태평소, 가야금, 아쟁 등에 주력하였다. 양태옥 유의 북춤은 신청농악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비무계로서 신청에 가입했던 경력이 있고, 소방대 농악을 이끌며 북춤을 계승해 왔기 때문이다. 이는 정병호(무형문화재 전문위원)가 그의 책 『농악』에서 보여줬듯이, 진도의 농악을 ‘신청농악’이라고 규정한 데서도 드러난다. 신청농악에서는 소고놀이, 방고(반고)놀이, 북놀이, 장고놀이, 상쇠의 부포놀이 등의 개인놀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진도북춤의 연마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양태옥 유의 북춤은 흔히 걸북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걸북춤의 구성은 2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장 1절은 머리춤, 2절은 살신무(殺神舞)인 살풀이 가락춤으로 되어 있다. 2장 1절은 오신무(娛神舞)인 삼채가락춤, 2절은 풍악무(風樂舞)인 당악가락춤, 오방진 가락춤, 벙어리삼채 가락춤, 영산다드레기 가락춤, 3절은 송신무(送神舞)인 이채가락춤, 휘몰이가락춤, 4절은 뒷풀이춤인 굿거리 가락춤으로 되어 있다.

장성천임회면 십일시에 전수관을 열어 북춤뿐만 아니라 판소리, 가야금 등을 후학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특히 「진도 북놀이」보존회를 이끌면서 「진도 북놀이」의 조직화에 힘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계 후에는 1997년 6월 24일자로 김길선이 예능보유자로 승계되었다.

박병천은 서울의 집(코리아 하우스) 때부터 안무하고 재창조한 북춤을 전국의 유명한 명인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개인 학원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근래에는 전남의 대불대학교에서 무속음악을 중심으로 한 진도북춤을 가르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사실상 진도북춤은 앞에서 열거한 네 명의 명인들에 의해 유파가 고정되어 가고 있다. 굳이 이들의 북춤을 비교해 보자면 김길선이 승계하고 있는 곽덕환이나 장성천 계열의 북놀이는 ‘놀이’에 가까운 안무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박관용 계열의 북놀이는 부드러운 춤사위가 특징이다. 양태옥 계열의 북놀이는 북을 비스듬히 뉘어서 메고 한 발을 안쪽 오금까지 오므려 들어 올리면서 치는 것이 특징인데, 이 북놀이를 계승하고 있는 박강열(의신면 돈지리 출신) 그룹을 보면 세 유파 중에서 가장 남성적인 북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세 북놀이의 공통적인 특징은 왼쪽 채를 오른쪽 북면으로 연신 넘기면서 가락을 치는 ‘다듬이질 사위’를 위주로 연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하면 박병천 계열의 북놀이는 처음부터 춤으로 출발했기 때문인지 이 다듬이질 사위가 빠져 있다. 이는 북놀이와 북춤의 차이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대신 네 유파 모두 엇박을 잘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진도북의 주요한 특징은 다듬이질 사위를 사용한다는 점과 엇박을 잘 활용하고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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