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 공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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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晋州城拱北門
영어음역 Jinjuseong Gongbungmun
영어의미역 Gongbungmun Gat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본성동 일대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고정은
[정의]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는 진주성의 북문.

[개설]
진주성은 고려 말까지는 토성이었으나,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석성으로 수축되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병사 김수이수일이 성을 증축하면서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게 되었고, 광해군 때 남이홍이 성을 증축하면서 11개의 포루를 설치하게 되었다. 내성과 외성으로 나뉘어져 있던 진주성은 한일합방 이후 원형이 훼손되어 내외성의 구분이 사라졌으며, 1983년에 복원정비를 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명칭유래]
공북문(拱北門)이라는 명칭에 대해 살펴보면, ‘공(拱)’은 두 손을 맞잡아 가슴까지 올려 절한다는 뜻이고, ‘북(北)’은 북쪽이라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으로 즉, 남면한 임금을 올려다보는 방향이 된다. 『고려사』에 ‘공립(拱立)’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공경을 표하기 위하여 두 손을 마주 잡고 서 있다’라는 뜻이다. 즉, ‘공북’이란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하여 공손하게 절을 올리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건립경위]
공북문은 병사 이수일김수가 쌓은 성이 너무 넓어 전체를 지키기가 힘이 들자 유사시 내외성을 모두 지키기 어려우면 내성만을 지키고자 쌓은 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말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의 「진주성도」를 참고로 하면 공북문은 내성의 북문에 해당하며, 홍예문(虹霓門) 위로 2층의 누각을 올린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진주박물관 소장의 진주성 병풍도와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진주성도」와 동일하다. 한편 『여지도서』의 기록에도 내성의 북문은 2층이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북문은 공북문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진주성도」에 그려진 것을 참고로 한다면 공북문은 성벽과 나란히 위치하며 홍예의 높이는 성벽의 높이와 거의 같고, 홍예 위로 올린 누각은 정면 3칸의 구조지만 2층은 1층보다 각 칸의 넓이를 좁히면서 올렸음을 알 수 있다. 공북문과 같은 2층 구조의 누각형식을 취하는 것으로 외성의 예화문을 들 수 있는데, 공북문은 북쪽에 계신 왕을 바라보는 문이므로 위엄을 갖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른 문보다 높게 쌓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공북문의 바로 앞에는 진무청과 중영(中營)이 자리잡고 있어 공북문이 내성의 정문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위치]
경상남도 진주시 본성동 진주성 내에 위치한다.

[현황]
진주성 공북문 복원계획을 수립한 진주시의 의뢰를 받아 1996년 5월과 6월에 경남문화재연구원이 공북문지의 위치와 규모를 확인하기 위해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일대는 저습지였으며 따라서 공북문은 판축으로 다져진 기초 위에 축조되었고, 공북문지의 육축규모는 넓이 8.3㎡, 높이 5.3m, 출입문의 폭은 4.6m라고 한다. 1603년(선조 36)에 축조된 공북문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후대에 공북문의 기단부를 이용하여 축조한 후대의 건물지에서 발견된 각자로 미루어 보아 1885년 전후가 되면 원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진주성 공북문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건립된 성의 정문으로서 동아대학교와 서울대학교 소장의 「진주성도」, 그리고 『여지도서』의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진주성의 배치구도와 각 건물의 용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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