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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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獨立運動家
영어음역 dongnip undongga
영어의미역 man of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호
[정의]
일제강점기 강릉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강릉의 독립운동은 영동 지방에서의 의병 활동의 연계선상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을미의병 당시 민용호(閔龍鎬)에 의해 강릉에 설립된 관동구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儀所)는 영동 지방 전체를 활동무대로 강릉의 대표적인 유림인 권인규(權仁圭)[건국훈장 독립장 추서]의 지원을 받으면서 전국 최대의 규모로 일제에 저항하였다. 이러한 민용호권인규의 항일의병 운동은 지역민들에게 있어서 민족의식을 자각시켜 주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강릉 지방의 신교육 운동으로 연결이 되었다.

이들 외에 김해석(金海石)[?~1908]은 1907년 양양에서 의병진을 조직하고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회양, 고성 등지를 무대로 항일활동을 전개하다 순국하였고, 강릉 출신 우상옥(禹相玉)은 1907년 정봉준(鄭奉俊) 의진(義陣)에서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또한 황청일(黃淸一)민용호 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고, 1906년에는 삼척에서 김성삼(金成三) 의진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피체되었으며, 신인로(辛仁老)[1872~1919]는 1907~1908년 사이에 김용상(金溶商)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을 모집하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었다.

한편 1906년을 전후하여 설립된 강릉 지방의 사립 신교육 기관들은 일제강점기에 힘겹게 존속하면서 이 지방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이때에 뿌려진 민족의식의 씨앗은 강릉 지방의 3·1 만세운동강릉농업학교의 항일 학생운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당시 강릉에는 8개의 학교가 있었다. 운정동 선교장의 주인이었던 이근우(李根宇)가 1900년 전후에 설립한 동진학교(東進學校)를 비롯하여 1906년 여운형(呂雲亨)이 초당의 부호인 경암(鏡巖) 최용집(崔溶集)의 후원을 받아 초당리에 설립한 야학교 곧 초당의숙(草堂義塾)[일명 영어학교], 1905년 강릉 옥가리(玉街里)[현 옥천동]에 설립된 영주학교(瀛州學校), 1908년 정현동(鄭顯東)이 교동 향교에 설립한 화산학교(花山學校), 1908년에 한원동(韓元東)에 의해 설립된 망상학교(望祥學校), 1909년에 모산하(茅山下)[현 유산동]에 설립된 모산학교(茅山學校), 1909년 신리면(新里面)에 설립된 신리학교(新里學校) 등이다. 강릉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이 학교들로부터 배움의 기회와 항일정신이 함양되어 이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한 주역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의 주역들]
강릉의 3·1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초순 읍내에서 시작되어 강릉 외곽 면소재지로 확산되면서 그해 5월까지 지속되었다. 강릉3·1독립만세운동의 핵심적 인물과 주도적 역할의 조직체들은 강릉보통학교 이명의(李明儀)를 중심으로 한 학생비밀결사조직, 강릉청년회 최선재(崔善在)·조대현(曺大鉉)·최선근(崔善根)·최돈옥(崔燉玉)·김진숙(金振淑)·최돈제(崔燉濟)·최선호(崔善浩)·정식화(鄭軾和) 등의 청년 비밀결사조직, 초당리 창동회(昌働會)의 구성원이었던 최이집(崔頤集)·최진규(崔晉圭)·박장실(朴章實)·최영방(崔永邦)·김봉공(金鳳公)·류옥일(柳玉一) 등 청년 비밀결사조직이었던 바, 이들은 상호 연계하여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3·1운동 및 기타 참여자 일람표[『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Ⅱ]에 의하면, 강릉 출신의 독립운동가로는 강릉농업학교 강덕선(姜德善)·권오담(權五談)·권오훈(權五勳)·권혁남(權赫南)·김남두(金南斗)·김덕봉(金石鳳)·김실광(金實光)·김종호(金宗鎬)·김진숙(金振淑)·김태선(金泰善)·노화경(盧和敬)·배석린(裵錫麟), 임정조사원(臨政調査員) 신태집(辛台集), 연희전문학교 이광준(李光俊), 대한독립애국단 안경록(安慶祿)·엄성훈(嚴成勳)·이명의(李明儀), 강릉농업학교 이원명(李源明)·이윤식(李允植)·장병탁(張炳鐸)·정식화(鄭軾和)·정창교(鄭瑲敎), 화산(花山)학교 정현동(鄭顯東)·조대현(曺大鉉)·최돈근(崔燉瑾)·최돈영(崔燉瑛)·최돈옥(崔燉玉), 초당의숙 최돈철(崔燉徹)·최선근(崔善根)·최선재(崔善在)·최선호(崔善浩)·최용식(崔溶植), 강릉공업학교 최용정(崔容鼎), 강릉농업학교 최종만(崔鍾萬)·최진규(崔晉圭)·함종명(咸鍾明), 해동공립심상소학교(海東公立尋常小學校) 홍순창(洪淳昌), 광복군 홍종석(洪鍾石) 등이다.

이들 38명 가운데 강릉농업학교 학생들이 14명이나 될 정도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대개 3·1 운동과 그 이후의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강릉의 3·1 만세운동의 주동자가 일제 기록에 의하면 입건자 145명, 부상자 82명임에도 불구하고 확인되지 않은 이유는 당시 관할법원이 함흥지방법원이어서 재판기록 열람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3·1 만세운동 주동자들이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조직이나 신상자료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릉의 3·1 운동과 기타 독립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과 강릉농업학교 독서회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는 안경록(安慶祿)[당시 39세] 목사를 들 수 있다. 안경록 목사는 1882년 3월 7일에 평안남도 삼화군(三和郡) 서리면(西里面) 율곡상리(栗谷上里)에서 태어났다.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하여 4년간 공부한 후 신학교로 편입하여 30세가 되던 1909년 졸업한 후 평양에서 전도사로 목회하였고 1915년에 강릉에 부임하였다. 강릉에 부임한 후 1916년 미감리회(美監理會)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영동 지방에서 목회활동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에서는 강릉중앙감리교회 담임목사로 3·1운동을 지도하였다. 1919년 9월에는 엄성훈(嚴成勳)과 대한애국단(大韓愛國團) 강릉군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안경록 목사와 뜻을 함께 했던 최선재(崔善在)[1895.10.4.~1953.9.26. 당시 25세]는 강릉시 성남면 입암리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한문을 배웠으며 최진규 등과 유도진흥동지회(儒道振興同志會)를 조직하여 조국 광복을 위하여 분발을 다짐하였다. 최선재는 교회를 다니면서 안경록 목사와 교분을 두텁게 하였고 3·1운동 당일에는 안경록 목사를 중심으로 강릉청년회 회원들과 합세하여 4월 2일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날 체포되어 징역 10월형을 언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최선재는 1927년 신간회의 총무간사를 맡으면서 신간회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43년까지 감시를 받을 정도로 오직 독립을 위한 일념을 불태웠던 인물이다. 최선재는 후에 건국포장[6등급]에 추서되었다.

이외에도 핵심인물로는 조대현(曺大鉉)·최선근(崔善根)·최돈옥(崔燉玉)·김진숙(金振淑)·이명의(李明儀)·최이집(崔頤集)·최진규(崔晉圭)·최영방(崔永邦)·박장실(朴章實)·김봉공(金鳳公)·정식화(鄭軾和)·최선호(崔善浩)·최돈제(崔燉濟) 등이다. 그 중 최돈옥[1897~1968]은 1919년 4월 2일 강릉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피체되었고, 최이집[1898~1964]과 최영방[1883~1951], 박장실[1889~1952] 등은 1919년 4월 4일 강릉 남대천 보수리 공사를 마치고 귀가 중 농민들과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피체되었으며 이들 모두 1995년에 대통령표창[7등급]에 추서되었다.

강릉농업학교 독서회는 1930년대 학원의 비밀결사조직으로서, 당시 북경대학에서 수업하고 돌아온 권오훈(權五勳)옥천동 집에서 권혁남(權赫南) 등 9명이 모여 결성하였다. 주로 사회과학계통의 서적과 반제국주의의 서적을 공동으로 구입하여 돌아가면서 읽고 모일 때마다 토론회를 열어 모임의 조직을 확대하고 항일민족전선을 강화시켜 나가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1930년 7월의 1차 동맹휴학 운동과 9월의 2차 동맹휴학 운동을 주도하였고, 그 결과 김남두·김태선 등 14명의 학생들이 퇴학처분을 받으면서 독서회는 일시 중지되었다. 1932년 4회 졸업생들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으며, 1933년 6월 20일 3차 동맹휴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34년부터 토요회로 그 맥을 이어나갔으나 강릉농업학교 항일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지도하던 강릉 지역의 사회주의적 운동가들의 대거 검거와 항일운동을 주도해오던 독서회회원들의 구속으로 그 종말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강릉의 독립운동은 보통학교 졸업생들로 구성된 강릉청년회, 교회의 안경록 목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교회청년회, 초당동의 영어학교를 중심으로 구성된 창동회 그리고 기성세대로서 유림이 참여하여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다. 각종 청년회가 한말의 애국계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지방사회의 신진세력이었다면, 이 지방의 유림들은 한말의 의병정신과 위정척사운동의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은 사회세력이었다. 그리고 지방에서 그 맹아적 양상을 띠고 있었던 교회세력은 신앙심에 기초한 종교집단이었다. 특히 창동회는 이 지방의 인사였던 최용집(崔溶集)과 몽양(夢陽) 여운형이 설립한 영어학교에서 신문학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의의와 평가]
강릉의 독립운동은 의병활동의 연계선상에서 유림, 종교인, 농민, 청년, 학생 그리고 일반 시민을 망라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이루어졌다. 학교를 통하여 신문학의 영향과 율곡 선생의 실천궁행을 이어받은 듯 모두들 오직 구국이념과 독립정신으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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