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관노 가면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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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江陵官奴假面劇
영어의미역 Gwanno Mask Theater of Gangneung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작품/무용과 민속극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장정룡
[정의]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관노들이 가면을 쓰고 추는 성황신제 계통의 탈춤을 중심으로 강릉 단오제 때 행하는 민속극.

[개설]
「강릉 관노 가면극」은 연희자들이 구한말까지 강릉부에 속했던 관노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매년 단오 때마다 관노들이 놀이판에 직접 참가하여 탈놀이를 하였다. 무언극의 형식으로 진행되는 이 「강릉 관노 가면극」은 조선시대의 다른 가면극처럼 풍자가 혹독하지 않고 춤과 동작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양반광대소매각시를 통한 화해와 사랑, 시시딱딱이를 통한 벽사의식, 장자마리의 풍요추구 등 성황신제 계통극의 전형성을 갖추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강릉의 가면극은 연희자들이 관노라는 신분에 있다는 사실이 공개됨에 따라 전승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구한말 개화 이후 관노가 없어진지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관노 가면극이라고 호칭함으로써 그들의 신분이 공개되었고, 따라서 연희를 기피했던 것이다. 강릉의 향토지인 『증수 임영지(增修臨瀛誌)』에 의하면 관노방이 8칸, 관노가 20명 있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도 대부분의 관노들이 여기에 참여했으며, 이들 가운데는 무속 관련 일에도 관여했던 이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문화재인 김동하, 차형원은 자신들이 관노였다는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다가 결국 이를 시인했다. 이들이 스스로 실토한 이야기가 오늘날 「강릉 관노 가면극」의 복원에 절대적인 자료가 되고 있다.

강릉의 가면극에 관노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일제 강점기 때에 경성 제국 대학에 교수로 있던 추엽융이 1928년 강릉 지역을 답사한 뒤 당시에는 전승이 끊긴 탈놀이를 산대희라고 하면서 『일본 민속학지』 2권 5호에 발표하면서 알려졌다.

물론 강릉에 탈놀이와 비슷한 것이 전승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한 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허균은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대령산신찬병서(大嶺山神贊幷書)」에서 “계묘년(선조36, 1603) 여름이었다. 나는 명주[지금의 강릉]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에 대령신을 맞이한다 … 그리하여 닷새 되는 날 잡희를 베풀어 신을 즐겁게 해드립니다.” 라고 하였다. 여기서 신을 위한 잡희(雜戱)가 베풀어 졌다고 한 것을 보면 강릉 탈놀이의 시원이 이러한 잡희에 있다는 것을 밝힌 것으로 유추된다. 실제로 여러 문헌에는 가면을 쓴 사람들이 잡희를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강릉의 향토지 『증수 임영지』에 언급된 창우배(倡優俳)의 잡희는 무당들의 풍악과 구별되는 가면극의 일종임을 알 수 있다. 창우배는 가면을 쓰고 노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를 살펴보면 강릉 가면극은 허균이 언급한 잡희로부터 출발하여 창우배로, 다시 가면극으로 어휘가 바뀌면서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과연 허균이 보았던 잡희와 오늘날의 가면극이 같은 것인지에 관한 의문이 남지만 이러한 역사를 가진 강릉의 가면극은 소급해보면 17세기 중엽부터 단오제에 전승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가면극은 일제 강점기 때에 추엽융이 조사할 당시에도 전해지지 않았으며 1966년 무렵 임동권이 조사할 때에도 이 탈놀이는 전승되지 않았다. 한일합방을 전후한 때를 현재 가면극이 마지막 상연된 시기로 추정한다. 심일수의 문집인 『둔호유고(遯湖遺稿)』에는 융희 3년(1909) 일본인들에 의해 무격희가 폐지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추엽융은 갑오개혁(1894) 이래 맥이 끊어져 볼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임동권 교수에 의해 가면극 연희자로 파악된 김동하가 1966년 당시 84세, 차형원이 당시 78세로 이들은 각각 21세와 17세 때에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고 회고했다.

임동권 교수는 1960년 7월 24일에 1차 답사를 하였으며, 1964년에 2차 답사, 1966년 6월 20일에 3차 답사를 했다. 임동권 교수는 김포에서 비행기로 북평 비행장에 내려가 강릉까지 자동차로 이동하여 대한여관에 투숙하였다. 이때에 당시 향토사가인 최선만, 홍덕유 교육장, 된장 회사 사장 남기의와 함께 대창역을 답사하였다. 1966년 6월 22일 저녁, 가면극에 대한 확증을 잡고 6월 23일 대한여관에서 녹음을 실시했다. 당시 교육 위원회에서 협조를 해서 교육 위원회 직원과 제보자인 차형원[79], 김동하[84], 장대연[88], 최재분[77.무가 제공], 홍재옥[60.오독떼기 제공], 최인수[68.집례맡은 사람], 우동식[80], 함종태[58], 방정자[49], 최돈순[53], 입암동 박씨 등이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동하 옹은 21세, 차형원 옹은 17세 때 「관노 가면극」강릉 단오제 공연 때 보았다고 하며, 장대연 무녀는 18세 때 그 춤을 마지막으로 본 것으로 기억하였다. 이러한 언급을 고려하면, 1966년 당시로부터 62년 내지 63년 전에 「관노 가면극」이 연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동권 교수는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1967년 1월 16일에 「강릉 관노 가면극」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67년 7월 20일에 4차 답사를 하여 관노가면을 제작하였는데 당시 중앙 대학교 조각과 윤영자 교수와 함께 삼흥여관에 투숙하면서 강릉 여자 고등학교에 보관중인 최상수 씨가 만들었던 가면을 인수하였고, 함종태 씨의 조언과 김동하, 차형원 옹의 고증으로 윤영자 교수가 석고로 가면을 제작하였다고 한다.

당시 김동하 옹과 차형원 옹은 강릉 여자 고등학교에 보관되었던 가면이 원형에서 거리가 멀다고 하였으나 임동권 교수의 언급에 의하면 두 노인이 석고로 만든 것을 보고 “그만하면 쓰고 놀 수 있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제는 석고로 만들어진 탈들이 김동하, 차형원 옹의 회고와 일치하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제작상의 미세한 차이가 아니라, 시시딱딱이탈의 경우는 입이나 코, 색상 등 전반적인 인상구현에 있어서 고증한 내용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이 지적된다. 이러한 차이점은 강릉 지역에서 출토된 망와와 대비한 글을 참고하면 알 수 있다.

「강릉 관노 가면극」은 1900년 초기에 사라졌다가 1965년 10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 서울 덕수궁 뜰에서 행해진 제6회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에 ‘강릉 성황신제 관노 가면희’라는 이름으로 강릉 지역 출신의 정의윤 선생이 도교육감의 추천 하에 춘천여자고등학교 학생들을 가르쳐서 참가, 장려상을 받으면서 탈놀이가 부활되었다. 당시 「강릉 관노 가면극」은 전국민속경연대회에 강원도 대표로 처음 출전하여 부활되었는데 초창기 이 일에 참여한 것으로 언급되는 최상수 씨는 발굴과 재현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음력 5월 5일 강릉에서는 단오굿 할 때에 주로 관노들의 놀음으로 탈놀음(假面戱)이 있었으니 이조말기 경술국치(國恥)되던 해까지 연출되었었다. …[중략]… 탈놀음은 하나의 여흥으로서 주로 강릉부에 소속되어 있는 관노(官奴)들이 5월 5일에 사창(社倉)앞의 넓은 광장에서 얼굴에 탈을 쓰고 또 가장을 하여 한 바탕 놀음을 노는데 오전 11시경부터 저녁때까지 행한다. 이때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수수댁, 소무(小巫)각시, 양반, 장자말이로 이들이 번갈아 나왔다 들어갔다 한다. 약간의 재담(才談)이 있으나 주로 춤이 위주이다.”

최씨에 의하면 1964년 이 글을 발표하고 가면희를 부활했으며 1965년 전국 민속 예술 경연 대회에 출연했을 때 해설문을 발표하고 또한 그 해 『중앙일보』 10월 12일자에 ‘강릉 성황신제 가면희의 부활을 위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였다고 술회하였다. 그는 1942년부터 1962년 되던 해에 이르기까지 여섯 차례 강릉 지역 민속을 조사하여 이 탈놀음의 전모를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이 탈놀음에 대해서 대부분의 강릉 지역 인사들도 그러한 탈놀음이 자기네 고장에 있었던 것조차도 아는 이가 거의 없었고 다만 나이 많은 몇몇의 노인들만이 소년 시절에 보았다는 이가 있었을 뿐이었다고 회상하였다.

최상수 씨가 조사한 대상은 1942년과 1958년 당시 강릉에서 김도수(金度洙)[강릉군 강릉읍 홍제리, 1942년 7월 조사], 김돌이(金乭伊)[강릉읍 초당리, 1942년 7월 조사], 김동하(金東夏)[강릉읍 교동리, 1958년 7월, 1964년 8월 조사] 씨가 있었는데 이들의 말을 참고하여 서울에서 조각하는 사람에게 위촉하여 만들었다. 당시의 등장인물로 시시딱떽이[수수댁], 소매각시(小梅각시), 양반, 장자말이라 했는데 그 이전 1928년 추엽융 조사에서는 양반광대(兩班廣大), 소무각시(少巫閣氏), 시시딱딱이, 장자말이로 기록되었고 『조선 총독부 생활 상태 조사 보고서』에도 양반광대, 소매각시에 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실린 바가 있다. “양반광대는 창우(倡優)로서 얼굴에 찰(札)[나무를 가지고 사람 상을 만들어 분장하여 장식하는 것]을 걸고, 머리에는 꿩 깃을 만든 뿔 모양의 관을 쓰고, 손에는 큰 그림부채를 쥐며, 몸에는 보통과 다른 옷을 입고, 무용 등을 한다. 소매각시는 창녀(倡女)로서 찰, 부채, 복장은 전자와 약간 달라도 춤은 같다.”

차형원 옹의 언급에 의하면 “그 재담이라는 거는 서루 말을 통하는 거 보담도 그 탈을 씨고 앉아서 서로 찝쩍거립니다. 가서 이렇게 서로 댕기고, 이래 서로 보고 이래, 취미로 그 이래지 뭐 뭔 사전에 뭔…” 이렇게 대사가 없다보니 효과적인 몸짓언어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탈놀이의 반주음악은 비교적 소상한 고증이 남았는데 차형원 옹은 날라리, 장구, 꽹새, 징 등을 오음육율에 따라 쳤다고 하였다. 이 탈놀이에 소요되는 시간은 고증에도 한 두어 서너 시간이며 대체로 더운 절기에 행해지므로 놀다가 더우니까 그 탈바가지를 벗어 놓는다 하였다. 여러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강릉 관노 가면극」은 무언극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거나 약간의 재담이 들어 있다고 했는데 이 부분은 인간문화재의 고증에도 분명히 나타난다.

1965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작업이 이루어졌으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가하면서 구체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서 1966년 문화재지정자료가 작성되고 1967년 1월 16일 강릉 단오제의 한 종목으로 가면극이 인정되어 무형문화재 13호로 지정되어 확고한 전승체계를 갖추었다. 이에 따라 60여 년 간 잠자고 있던 탈놀이가 다시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후 1960년대 후반부터 강릉 여자 고등학교, 강릉교육대학교가 이를 전수했고, 1976년부터 강릉 여자 고등학교관동대학교가 전수 받고, 1990년부터 강릉 원주 대학교에서 이 놀이를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임영회, 경포 초등학교 등에서 전수를 받고 있다.

무형 문화재로 지정된 「강릉 관노 가면극」강릉시 유천동 주민들을 대상으로 1983년 2월부터 지도하여 1993년 8월 2일 기예능 보유자로 권영하(權寧夏)[1918년 6월 4일생, 작고]가 지정되었고 뒤를 이어 김종군(金鍾群)[1942년 3월 5일생]이 기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앞서 여러 단체에서 사용한 탈이나 놀이내용의 고증이 미흡하다는 등 여러 문제점이 발견됨에 따라 현재는 1966년 김동하 옹과 차형원 옹이 제보한 고증과 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연희를 충실히 복원하여 전수하도록 애쓰고 있다.

[구성]
탈놀이의 내용은 고증 내용에 따라 놀이마당을 분류하면 대체로 다섯 마당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장자마리 개시, 둘째 양반광대 소매각시 사랑, 셋째 시시딱딱이 훼방, 넷째 소매각시 자살 소동, 다섯째 양반광대 소매각시 화해이다.

(1) 첫째 마당 : 탈놀이 시작과 함께 먼저 포대자루와 같은 포가면을 전신에 쓴 두 명의 장자마리가 연희를 개시한다. 요란하게 먼지를 일으키며 불룩한 배를 내밀면서 놀이마당을 넓히기 위해 빙빙 돌아다닌다. 관중을 희롱하기도 하고 선 사람을 앉히기도 하며 모의 성적 행위의 춤도 춘다. 옷의 표면에는 말치나 나리 등의 해초나 곡식을 매달고, 옷 속에는 둥근 대나무를 넣어 불룩하게 나오도록 한다. 장자마리는 희극적인 시작을 유도하며 마당을 정리하고 해학적인 춤을 춘다.

(2) 둘째 마당 : 장자마리가 마당을 정리한 후 양반광대소매각시가 양쪽에서 등장한다. 양반광대는 뾰족한 고깔을 쓰고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점잖고 위엄 있게 등장하여 소매각시에게 먼저 사랑을 구한다. 소매각시는 얌전한 탈을 쓰고 노랑 저고리 분홍 치마를 입고 수줍은 모습으로 춤을 추며 양반광대와 서로 뜻이 맞아 어깨를 끼고 장내를 돌아다니며 사랑을 나눈다.

(3) 셋째 마당 : 시시딱딱이는 무서운 형상의 탈을 쓰고 양쪽에서 호방한 칼춤을 추며 뛰어 나온다. 양반광대소매각시의 사랑에 질투를 하며 훼방을 놓기로 모의하고 때로는 밀고 잡아당기며 훼방하다가 둘의 사이의 갈라놓는다. 시시딱딱이는 무서운 벽사가면을 쓰고 작은칼을 휘두르며 춤춘다.

(4) 넷째 마당 : 시시딱딱이양반광대소매각시 사이를 갈라 한쪽에서는 양반광대와 놀고 다른 편에서 소매각시를 희롱하며 함께 춤추기를 권하나 소매각시는 완강히 거부한다. 이를 본 양반광대는 크게 노하며 애태우나 어쩔 수 없어 분통해하다가 시시딱딱이를 밀치고 소매각시를 끌고 온다. 소매각시가 잘못을 빌어도 양반광대가 질책을 계속한다. 소매각시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한다는 구실로 양반광대의 긴 수염에 목을 매려고 한다. 수염에 목을 매어 죽으려는 소매각시의 결백호소에 양반광대는 놀라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소매각시를 용서한다. 결국 소매각시는 결백을 증명한 셈이 된다. 수염으로 목을 감는 모습은 해학적인 표현임과 함께, 권위의 상징인 수염을 당기어 결백을 오히려 시인케 하는 내용은 죽음 의식을 초월한 희극화된 표현이다.

(5) 다섯째 마당 : 수염을 목에 감고 자살을 기도하여 결백을 증명하려 했던 소매각시의 의도는 양반광대의 관용과 해학으로 이끌어져 서로 오해가 풀리고 결백이 증명되므로 탈놀이는 흥겨운 화해와 공동체 마당으로 끝을 맺는다. 악사들과 괫대, 구경하는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춤을 춘다.

[가사]
「강릉 관노 가면극」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무언극이다.

[내용]
등장인물은 모두 개성이 강하게 표출되는데 「강릉 관노 가면극」에는 양반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 2명, 장자마리 2명으로 총 6명이 등장한다.

먼저 양반광대는 호색 풍자나 어리석음을 희화화(戱畵化)하기 위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양반광대의 광대(廣大)는 『고려사(高麗史)』124권 「전영보전(全英甫傳)」에 “우리말로 가면을 쓰고 노는 자를 광대라 한다”는 언급과 같이 탈놀이하는 연희자를 일컫는다. 특히 일본인 추엽융의 1928년 조사에서 양반광대가 쓰고 나오는 변(弁)은 호랑이 수염이 달린 가면에 긴 뿔이 있는 관을 쓴다고 하였고, 1931년 생활상태조사 보고서에서도 머리에는 꿩 깃으로 만든 뿔 모양의 관을 쓴다 하였다. 차형원 옹은 정자관을 썼다고도 하나 여러 고증에 뿔 모양을 강조하고 있으므로 나장(羅將)이 쓰던 깔대기 전건(戰巾)이었거나 고구려인이 썼던 절풍건(折風巾)일 가능성이 크다. 『증수 임영지(增修 臨瀛誌)』는 나장의 전건을 소장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아울러 중국 귀주 산간지방의 나례(儺禮)에서 양반광대의 것과 같은 모양의 흑백 고깔을 쓰고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양반광대 역시 나례인물로 짐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다.

소매각시는 양반의 상대역으로 호색을 풍자하기 위한 인물로 표상된다. 소매각시에 대한 오해는 소무각시라고 기록한 추엽융의 강릉 단오제 조사보고서에서 비롯된다. 소매각시를 무녀로 파악하기도 하였으나 추엽융은 소무각시(少巫閣氏)라고 썼지만 괄호 안에 영어로 ‘Somai’(소매)라고 적어 놓는 치밀함을 보여 주었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도 소매가 나오며, 유득공[1748~?]의 『경도잡지』에는 “小梅亦古之美女名(소매는 역시 옛 미녀이름이다)”이라는 내용과 “閣氏者東語女子也(각씨는 우리말로 여자이다)”라는 내용을 방증자료로 삼은 바가 있다. 따라서 강릉 가면극의 소매는 나례의 의식에 나오는 소매(小妹, 小梅)를 차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시시딱딱이는 수수댁, 시시딱떽이, 시시딱대기, 시시닦덕기, 수수딱때기 등으로도 나타나는데 어원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추엽융의 조사에서 방상씨(方相氏)의 가면과 같은 무서운 목제가면을 쓴 것으로 나타나고 인간문화재의 고증에서도 방상씨가 언급된다는 점, 그리고 ‘쉬시 쉬시’하면서 등장한다는 점과 딱딱이패가 놀이패를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시시’라는 축귀어(逐鬼語)에 딱딱이가 합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점은 최상수의 고증과도 일치한다. “이 가면희(假面戱)에 나오는 등장인물 중에 그 어의(語意)가 불분명한 것이 있으니, ‘시시딱떽이’이다. 이 말을 그 지방 노인(老人)들도 무슨 말인지 그 말뜻은 모른다. 나의 생각으로는 쓰고 나오는 이 가면(假面)이 방상씨(方相氏) 가면(假面)인 것으로 보아 ‘시시(쉬쉬)’와 ‘딱떽이’가 복합(複合)된 말로서, 시시딱떽이란 이 가면(假面)을 쓰고 사방의 사귀(邪鬼)를 쫓아내는 구나(驅儺)때에, 방망이를 쥐고 이곳 저곳을 “시(쉬)- 시(쉬)”하고, 또 방망이로 이곳저곳을 딱딱 때리는 것이므로 ‘시시딱떽이’란 이름이 붙은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이 인물은 벽사의 역할을 하며, 전염병을 예방하는 뜻으로 잡귀를 쫓기 위해 오방색 탈을 쓰고 방망이 또는 황토를 칠한 칼을 들고 나타난다. 시시딱딱이가 들고 나타나는 것이 방망이냐 칼이냐 하는 문제는 김동하, 차형원 옹의 고증상에는 분명히 분홍색 칠을 한 칼을 들고 나타나는 것으로 언급되었다. 『조선의 향토오락』에서도 강릉 지방의 「오광대놀이」라고 소개하면서 목제인형을 만들어 노는 것이 전염병예방을 위한 것이라 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단오 무렵 질병을 구축하기 위한 상징적 나례의식으로도 파악된다.

장자마리는 장자말, 장재말이라고도 하는데, 양반을 뜻하는 장자(長者)의 하인인 마름이 합성된 것으로 유추된다. 양반광대를 해학적으로 만들며 놀이를 희극화하는 인물로 회청색 포대를 뒤집어쓰고 불룩한 배를 만들어 이것을 돌리면서 무대를 넓히고 관중을 웃긴다. 옷의 색깔은 땅과 바다를 연상케 하고, 옷의 표면에 곡식의 줄기인 나리나 해초인 말치 등을 매달고 나와 풍농어를 기원한다. 그런데 이런 유형의 포대가면은 하회별신극의 주지, 통영 오광대의 중광대처럼 신앙적 기능을 갖고 있으며, 일본 오키나와의 신가면이나 경우에도 이러한 형태를 띠고 있는 것으로 보고된다. 따라서 강릉가면극의 등장인물은 명칭이나 형태에서 나례의 기능인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이러한 신앙적 기능은 탈놀이의 원초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등장인물의 춤사위를 고증한 내용을 바탕으로 추려내면, 장자마리의 춤사위는 소위 ‘마당딱이춤’이다. 마당을 닦듯이 추는 춤이라는 뜻인데 매우 독특하다. 이와 함께 ‘도리깨춤’을 춘다. 배불뚝이 모습으로 도리깨를 쳐내듯이 마당을 넓게 하려는 의도로 추는 춤이다. 차형원 옹의 언급대로 “장자마리가 맨 먼저 나와서 그 참 마당땍이야. 전부 그 노는 장소를 한 번 멀리도 맨들어 놓고 좁으면 저리 좀 피해라고 사방 이렇게 물려서 널찍하게 이렇게 맹글어 놓고…그거는 보통 그 참 누구 말마따나 마뎅이, 그전 옛날 마뎅이 할 때 도리깨 쳐내듯이”라고 한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은 양반광대소매각시의 춤사위로 고증에는 점잖게 추는 ‘맞춤’과 ‘어깨춤’에 대한 언급이 들어 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 “춤은 반드시 대무(對舞)인데 남자는 소매를 펄럭이고 여자는 손을 뒤집는다”는 표현과 일치한다. 즉 차형원 옹은 “나가서 우선 발 드는 것이 저짝 여자는 왼짝을 듭니다. 남자는 가서 인제 오른짝을 들고 나갑니다. 인제 서로 좌우에 갈라서서 서로 춤을 추고 걸음걸이도 함부덤 안 걸었습니다. 아주 이렇게 자욱을 곱게 이렇게 참 떼어놓으며 춤을 추고 이렇게 딱 마주합니다. 해 가지고는 서로 돌아가고...”라고 묘사하고 있다.

시시딱딱이 춤사위는 가면극의 상징성을 잘 보여주는데, 무서운 탈을 쓰고 칼을 휘둘러 재앙을 쫓는 ‘칼춤’과 사랑놀음을 훼방하는 ‘제개는춤’ 그리고 소매각시를 유혹하는 ‘너울질춤’을 춘다. 차형원 옹은 “아 그 험한 탈을 쓰고 거기 가서 인제 가꾸 제갭니다. 이리두 찝쩍, 저리두 찝쩍”한다고 묘사했고, 김동하 옹은 “벌건 저 버드낭그로써 깎아서 뻘건 칠을 해서 지레기 요만큼 해서 들었지요. 그 속에서 들고 있다가 그저 이렇게 휘 둘르고 추고 이러니 그 칼이 이러니 가끔 불쑥불쑥 나오더구만요.”라고 묘사했다.

차형원 옹의 고증에는 날라리, 꽹과리, 북, 장구, 징 등을 사용했고 무당들이 반주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관련 의례]
강릉 가면극은 주로 음력 5월 5일 단오 무렵에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강릉 관노 가면극」 연희자였던 김동하(金東夏)[1884년 1월 22일생], 차형원(車亨元)[1890년 9월 5일생]씨를 대상으로 조사된 1966년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된 문화재 지정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음력 5월 1일 본제가 시작될 때 화개(花蓋)를 만들고 이때부터 연희가 이루어져 4일과 5일에 걸쳐 이어졌다고 한다. 추엽융의 조사에도 5월 1일 본제 때부터 화개를 꾸미고 가면극을 했는데, 화개는 부사청에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가면극은 4일 날 대성황사 앞에서 놀고 5일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연희장소는 강릉 남대천 변이 아니라 대성황사를 비롯하여 여러 곳으로 옮겼는데 음력 5월 5일에는 오전 대성황사 앞에서 먼저 행하고 다음에는 화개를 받들고 약국성황당, 제관청, 여성황당의 순으로 순례하며 탈놀이를 했다. 현재는 여성황당을 제외한 나머지 장소가 없어졌기 때문에 남대천 단오터에서 4일간 연희하고 있다.

[현황]
「강릉 관노 가면극」은 관노들에 의해 추어진 탈놀이다. 관노들이 단오제 행사에 참가하였음은 물론 제관 중에 삼헌관으로 관노가 있었고 관노가 앞에서 태평소를 불며 일행을 이끌었던 것 등을 보아 관노들의 역할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갑오경장 때 공식적으로 공사노비법이 혁파된 후 전승상의 어려움을 겪다가 1909년경에는 중단되었다. 대략 60여 년이 지난 후에야 당시의 연희자들을 찾고 고증을 하여 「강릉 관노 가면극」은 세상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연희자였던 김동하·차형원의 고증과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성황제 탈놀이로 강릉 탈놀이는 다시 정립되었다. 이제는 관노라는 이름을 붙일 이유도 없어졌고 신분상의 제약이 연희의 활성화에 지장을 주지도 않는다. 그것은 이 지역의 유천동 연희자들이 그 맥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의의와 평가]
「강릉 관노 가면극」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무언극으로 마을 축제에서 행해진 성황신제 가면극이다. 구한말까지 행해지다가 관노제의 폐지로 중단되었으나 1967년 국가 지정 무형 문화재13호로 지정되면서 부활하였다. 한국가면극의 토착적 시원을 보여주는 무언극으로 강릉 단오제의 의미를 구현하는 연희로 평가받고 있다.

앞으로 동해안 무속춤이나 강릉농악 춤사위를 보다 폭넓게 원용하거나 같은 부류에 들어가는 하회 성황제 탈놀이의 춤사위도 활용한다면 춤사위가 풍부하게 늘어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장자마리의 춤은 신앙적 행위로 신비로운 벽사춤이 되어야 할 것이고, 양반광대소매각시는 어깨춤을 중심으로 한 허튼춤을 꾸준히 추면서 성적인 매력을 위시하며 극적 내용을 몸짓으로 표현하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시시딱딱이 춤은 본격적인 검무가 나와야 할 것으로 지적되는 것은 타당하다.

아울러 장단도 단조로운 강릉 농악 장단을 사용하고 있는데 여기에 구한말 악공들이 연주했던 춤가락을 활용하고 강릉 무속 음악을 원용하는 방안도 강구되어야 하겠다. 그것은 관노 중에 무격으로 일했던 사람들이 많았고, 탈놀이와 무격희를 대성황당이나 여러 곳을 함께 순례하면서 행했던 이유에서도 기인한다. 따라서 반주 음악을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무속 음악을 활용하는 방안도 모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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