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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옥년 할머니의 생애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T02022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집필자 현혜경

생애사

용담1동의 마을 변화는 급격히 일어나, 도시환경의 변화 못지않게 이동 인구도 많아져 이곳에서 용담1동 토박이를 찾아 옛 이야기를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오래 살았다는 사람들이 대체로 30년 안팎이었다. 고작해야 1970년대 이후 이야기나 듣게 되는 셈인데, 대부분 책자를 통해 습득한 용연 이야기나 제주향교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다 용담1동에 전설이 남아 있는 곳들을 찾아 발길을 옮기던 중 향굣길 지경에서 ‘비룡못’ 동네에 사는 신옥년을 만났다. 예고된 일이었던 것일까? 길을 가다 마실 다녀오는 인상 좋은 호호 할머니에게 옛 지명을 여쭤보려고 우연히 말을 건넸는데, 그토록 찾던 용담1동의 토박이 할머니였다. 신옥년은 태어나서 여태까지 용담동에 살아오고 있는 진짜 ‘토박이’였다. 신옥년의 집을 처음 방문하던 날, 신옥년의 집은 고즈넉했다. 그의 집은 비룡3로 48번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의 집은 옛 지경이나마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안채와 바깥채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게 마주보고 위치해 있었다. 마당은 흙을 그대로 두어 텃밭으로 일구어 배추와 무 같은 채소들을 재배하고 있었다. 그는 필자 일행을 기다리며 친구와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용담1동의 이야기는 시작되었고, 필자 일행은 그의 삶 이야기를 통해 용담1동의 1920년대 이후부터 오늘날의 용담1동의 마을 이야기를 듣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

신옥년은 평산 신씨로 1923년 10월 11일(음)에 목수일을 하시는 부친 신창준과 모친 김한선 사이에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한다. 현재 나이는 84세인데도 건강해 보였다. 신옥년이 사는 집 안채에는 95세인 큰 언니(1912년생)가 살고 있었는데, 언니도 건강해서 혼자 자주 외출을 할 정도였다.

신옥년에게 가족에 대한 기억을 묻자, 신옥년의 부친에 대한 기억은 재능이 많은 분으로 기억을 하고 있었다. 부친은 여러 명의 목수를 거느릴 정도로 큰 목수였다고 한다. 제주도 전 지역을 돌아다니며 건축 일을 할 정도로 유명했고 관공서 건물도 대량 맡아서 건축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당시 제주 시내 유명 인사들과도 가깝게 교류했던 모양이다. 부친은 박종실, 최판서 등과도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때문에 필자는 신옥년에게서 박종실과 최판서에 대한 인상을 들을 수 있었는데, 박종실이 간간히 부친의 집을 방문할 때면 고운 미영(?)천으로 만든 두루마기에 방립을 쓰고 와서는 마루에 앉아 부친과 담소를 나누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사실 박종실은 제주 거부로 유명한 상인이었다. 그가 엿장수를 해서 돈을 모은 과정이나, 아들들을 모두 도지사, 방송국 사장, 국무총리 서리 등으로 출세시킨 내용이나, 후에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한 일 등으로 제주에서는 그와 관련된 구전은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박종실의 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친은 신옥년이 열 살 때쯤 연로해서 목수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큰 오빠와 작은 오빠

모친 김한선에 대한 기억은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신옥년은 큰오빠와 작은오빠에 대해서는 많은 기억들을 갖고 있었다. 큰오빠와는 일본에서 같이 생활한 때문이기도 했다. 신옥년의 큰오빠는 래물 지경의 여자와 선으로 만나 장가가기 전부터 일본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혼인하기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나가서 비행기 부속품을 만드는 공장을 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그랬지만 노름에 그만 번 돈도 모자라 집안의 재산도 팔아갈 정도로 망해버렸다고 한다. 그래도 큰오빠와 올케는 사망한 뒤 제주의 신씨 가족 공동묘지에 유골이 안치되었다. 큰오빠에게는 아들 삼형제가 있었는데, 유골을 안장할 때도 그 조카들이 와서 많은 돈을 문중에 기부하였다고 한다.

큰오빠의 삶과는 다소 다르게 작은오빠는 20대에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에 쫓기자 일본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3·1운동 때는 머리가 좀 공부덜 헌 사름, 그런 뭣이 있주기게(3·1운동 때는 공부를 해서 머리에 든 게 있는 사람들이, 그런 뭐가 있었다)”하는 말 속에 작은오빠는 지식인층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은오빠는 집에다 야학을 열고 한글을 가르치고 했던 분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이곳을 동네 사람들과 아이들은 ‘복습소’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복습소에서 아이들은 아침까지 공부를 하기도 해서 밤을 지새우는 아침이면 학생들이 “아사오끼까(아침이다 일어나)”하면서 ‘용수(용연)’ 지경에 모두 세수들을 하러 몰려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수돗물이 없을 때라 ‘용수물’까지 종종 세수들을 하러 갔다는 것이다.

이때 신옥년도 글을 배울 나이였는데, 다른 가족과 동네 어른들이 여자는 글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작은오빠는 ‘은 년아, 은 년아(막내야, 막내야)’ 혹은 ‘아기야, 아기야’ 부르며 불러다 여학생과 남학생들 사이에서 같이 공부를 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글을 예쁘게 쓰는 방법을 가르쳐 줘도 싫증이 나서 게으름을 피울 때면 작은 오빠는 ‘은 비라리’하면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밤이면 밤마다 작은 오빠가 공부하라고 부를까봐 제발 부르지 말았으면 노심초사하여 도망을 가기도 하고 숨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작은오빠였기에 신옥년이 10살의 어린 나이에 일본에 건너가게 되자, 연필과 노트를 사주며 한글 공부를 당부했다고 한다.

언니들

신옥년은 지금 큰언니와 살고 있지만, 바로 세 살 위의 언니는 제주시 오라 지경이 시댁 고향이었는데, 일본에서 생활하다 북한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북한에서는 60세가 넘으면 일도 시키지 않고 아이들도 공짜로 공부를 시킨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 사회에서 천대받던 재일교포 1세와 그 2세들은 주저없이 아이들의 교육과 차별을 피해 북한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때문에 지금도 제주 사회에서는 일본과 북한에 가족들이 있는 집이 많다고 한다. 역사의 질곡을 몸으로 느끼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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