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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만호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607
한자 耽羅萬戶
영어음역 Tamna Manho
영어의미역 Tamna Naval Officer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일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연도/일시 1301년연표보기
폐지연도/일시 1397년연표보기
소속관서 탐라군민만호부
관품 3품
정원 1인

[정의]

고려 후기 탐라군민만호부의 장관, 혹은 군사 지휘관의 직함.

[개설]

만호는 고려와 조선시대 무관직의 하나인데, 애초 만호란 만호부의 장관이며 만호부는 원나라의 제도에서 유래했다. 만호에는 고려 관인이 나아갔지만 이미 원으로부터 만호의 직위를 받았던 자들만이 나아갈 수 있었던 만큼, 그 임명에 원이 직접·간접으로 관여했으며, 이 점은 탐라만호부도 마찬가지였다.

[제정경위 및 목적]

만호부의 설치는 고려가 1281년(충렬왕 7) 일본과 더불어 요충지에 해당하는 금주(金州)[경남 김해]·합포(合浦)[경남 마산] 등의 연해처에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는 진변만호부(鎭邊萬戶府) 설치를 원에 요청하고, 원이 이를 받아들인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고려는 원에 일본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서는 진변만호부 같은 기구가 설치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니 탐라총관부를 폐지하고 만호부를 두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고 건의하였다.

이에 따라 고려의 지방군 조직은 기존 주현군(州縣軍) 체제에서 원의 군제(軍制)인 만호부 체제로 개편되었으며, 이에 근거해 지방군이 연해처에 주둔했다. 그리하여 1301년(충렬왕 27) 제주 지역에도 탐라군민만호부(耽羅軍民萬戶府)가 설치되었으며, 그 장관으로 탐라만호가 부임해 왔다. 탐라총관부가 원의 직접 지휘를 받았던 반면, 탐라군민만호부는 고려의 왕이 장관인 정동행성 관할 하에 두었다.

[담당직무]

본래 만호부는 군사 조직으로의 성격을 지녔으나 고려에 설치된 만호부의 만호는 군사 업무와 민정을 모두 관할했고, 더 나아가 수령의 시정을 감독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이들이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민폐를 자주 야기하곤 하였다.

이에 만호부는 고려의 독자적인 행정 체계를 부인하거나 위축시켰던 존재라 할 수 있다. 탐라만호도 원 간섭기 육지부 지역 만호부의 군관처럼 대부분 가혹한 수탈을 행하였기 때문에 견디다 못한 탐라민은 봉기를 일으킬 정도였다.

1318년(충숙왕 5)에 탐라민이 봉기하였는데, 그 원인 중의 하나는 탐라군민만호부의 군관 대호군(大護軍) 장공윤(張公允)의 탐욕과 포악 때문이었다.

[변천]

만호는 본래 그가 통솔하여 다스리는 민호의 수에 따라 만호·천호·백호 등으로 불렸으나, 차차 민호의 수와 관계없이 진장(鎭將)의 품계와 직책 등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만호부는 1356년(공민왕 5) 단행된 공민왕의 반원 정책으로 그 성격이 크게 변하였다.

1356년 고려는 원이 설치했던 중군(中軍)·우군(右軍)·좌군(左軍)만호부,순군(巡軍: 중앙설치)·합포·전라·탐라·서경(西京)[평양]만호부 가운데 유사시에 편성되는 전자의 3개 만호부만을 제외한 채 나머지는 없애버리는 한편, 독자적으로 만호 등의 관직을 임명하였다.

탐라만호부의 경우는 1356년(공민왕 5) 폐쇄되는 한편, 윤시우가 제주도순문사(濟州都巡問使) 직책을 지녀 탐라만호부의 만호 대신 군사 책임자로 파견되었다. 탐라만호부 폐쇄와 제주도순문사 윤시우의 파견은 서로 연결고리를 갖는 반원 정책의 조처였던 것이다.

그런데 탐라 군사 책임자의 직책은 곧 1357년(공민왕 6) 직후부터 만호로 다시 바뀌었다. 이로부터 고려가 보낸 탐라만호는 반원 정책이 단행되기 이전과는 달리, 원이 아니라 고려왕이 임명권을 행사했다.

그럼에도 기록을 통해서는 1362년(공민왕 11)에 이르러 탐라만호 박도손(朴道孫)이 처음으로 확인되고 있다. 더구나 고려왕이 임명권을 행사한 탐라만호는 당시 육지부에서도 확인되고 있듯이, 만호부의 장관이 아니라 만호의 명칭을 가진 군사 책임자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만호는 만호부 장관에게만 수여되는 것이 아니라 실전에 나아가는 장군에게도 수여되었으며, 여러 만호부가 철폐된 1356년 이후에는 단순한 군사 지휘자가 지녔던 관직이기도 하였다.

이러다보니, 탐라만호부의 폐쇄 이후에도 탐라만호가 계속 존재했으나 탐라에 만호부가 설치된 사실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은 한편, 제주목사가 왕왕 탐라만호를 겸직했던 것이다. 탐라만호라는 직책은 조선시대인 1397년(태조 6)까지 지속되다가 이후에 비로소 폐지되었다.

역대 탐라만호의 역임자로는 장공윤(張公允)·임숙(林淑)·박순인(朴純仁)·문아단불화(文阿但不花)·박도손(朴道孫)·김중광(金仲光)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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