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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11524
한자 防護所
영어음역 banghoso
영어의미역 defence and protection station
이칭/별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부(전통 시대)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동전

[정의]

조선시대 제주 지역의 방어 요충지에 설치된 진(鎭).

[개설]

방호소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침입이 예상되는 요충지에 설치하여 방호 임무를 수행하던 군대의 경계 감시소이다. 각종 읍지나 『제주계록』에는 ‘진(鎭)’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관련기록]

방호소에 관해서는 『세종실록』에 “도내 군인이 주둔하는 곳은 본주 동쪽은 김녕·조천관, 서쪽은 도근천·애월·명월이며, 대정현 서쪽은 차귀, 동쪽은 동해이고, 정의현 서쪽은 서귀, 동쪽은 수산 등입니다. 모두 왜구가 정박할 수 있는 요해처로 전에 모두 방호소를 두었습니다. 김녕소의 군인은 마보명 아울러 153명, ……번을 나누어 방수합니다.”라고 씌어 있다.

조선 전기에 모두 9곳에 방호소가 설치되었으나, 성이 축조되지 않아 방어하기가 어려우므로 축성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중종실록』에 의하면, “앞서 설치한 방호소에 각각 육군 1려(旅)를 2번으로 나누고 군관을 보내어 방어하도록 하였습니다. 수산과 차귀 2포는 옛 성을 개수하고 함정과 말뚝을 설치하였습니다. 나머지 7포는 원래 성이 없었으므로 지키는 데 의지할 곳이 없어 매우 허술합니다.”라고 하였다.

즉, 성을 쌓지 않은 방호소 7곳이 있으며, 이들 방군(防軍)은 2교대로 나누어 방어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원진『탐라지』의 ‘방호소’ 조에 “방호소에는 아직도 군대가 있는데 바람이 온화할 때엔 특별히 각 방호소에 조방장을 파견하여 변란에 대비한다.”(防護所旅帥猶存 風和時 別遣助防將于各所 以待變)고 하여, 평소에는 여수(旅帥)의 지휘 하에 방수하고, 변란 시에는 본영에서 조방장이 파견되었다.

『탐라방영총람』의 기록에 나타난 조선 후기 방호소의 군액을 보면 어느 진이든 방군(防軍)의 군액이 가장 크고, 다음으로 궁인과 시인의 군액이 컸다. 지역별로는 별방진·화북진·차귀진 등의 군액 규모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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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방호소의 군액

[변천]

김석익의 『탐라기년』에 의하면, 김녕방호소는 1510년에 별방으로 이설하였고, 동해방호소는 1678년에 모슬포로 이설되었으며, 같은 해에 화북에 성이 설치되었다.

[조직]

조선 전기에는 여수(旅帥)를 본영에서 파견하였으나, 1678년 이후에는 조방장(助防將)이 차정되었다. 1707년에는 수산과 차귀에는 만호를 두기도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조방장으로 환원되었다. 다만 명월 방호소의 경우 1764년 만호로 승격되어 제주에는 만호 1인, 조방장 8인으로 각 방호소의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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