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8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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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瀁 |
영어음역 | Jeong Yang |
이칭/별칭 | 안숙(晏叔),부익자(孚翼子),포옹(抱翁),문절(文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인호 |
출생 시기/일시 | 16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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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18년![]() |
활동 시기/일시 | 1645년![]() |
활동 시기/일시 | 1655년![]() |
활동 시기/일시 | 1668년![]() |
몰년 시기/일시 | 1668년![]() |
묘소|단소 |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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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 충청북도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영일(迎日) |
대표 관직 | 사헌부 장령 |
충청북도 제천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안숙(晏叔), 호는 부익자(孚翼子)·포옹(抱翁). 할아버지는 정철(鄭澈)이고, 아버지는 강릉 부사를 역임한 정종명(鄭宗溟)이다.
정양(鄭瀁)[1600~1668]은 1618년(광해군 10) 사마시에 입격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 삼척에서 은거 생활을 하다가 1645년(인조 23) 동몽교관에 제수된 뒤 내외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55년(효종 6) 태백산 도심리(道深里)에 들어가 우거하였다. 이후 송시열의 추천으로 제천 월림에 터를 잡았다. 그 뒤 주부·현감·사헌부 지평·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668년(현종 9)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인의 대표적 학자이던 송시열(宋時烈), 유계(兪棨) 등과 가까이 지냈다.
문집으로 『포옹집(抱翁集)』이 있으며, 『어록해(語錄解)』를 증수 간행하였다.
묘소는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 있으며,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