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300720 |
---|---|
한자 | 淸風金氏 |
영어음역 | Cheongpung Gimssi |
영어의미역 |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충청북도 제천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
집필자 | 박인호 |
세거|집성지 |
충청북도 제천시 수산면 도전리|금성면 사곡리![]() |
---|---|
성씨 시조 | 김대유(金大猷) |
김대유를 시조로 하는 충청북도 제천시의 세거 성씨.
청풍 김씨의 시조는 고려 말 문하시중을 지낸 김대유(金大猷)로, 신라 경순왕의 넷째 아들인 김정구의 17세손이다. 김대유가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으로 하였다. 김대유의 묘소는 옛 청풍부 도전리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실묘하여 후손들이 제천시 수산면 도전리에 시조 제단(祭壇)과 단비(壇碑)를 세웠다.
그 이후로 청풍 김씨는 중앙 관직을 통해 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성장해 나갔다. 고려 말 김충(金忡)은 영동정(令同正)을 역임하였다. 이후 집의를 지낸 김직방(金直方)과 김광무(金光茂), 현감을 지낸 김효례(金孝禮), 공신인 김길통(金吉通)[1408~1473]으로 이어진다. 조선 전기에는 김길통과 김순명(金順命)[1435~1487] 부자에 이르러 과거 시험과 공신으로서의 공훈을 바탕으로 중앙 정계에서 활약하면서 당시 지역에서의 유력 가문으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계열에서는 이후 지역에 기반한 사마시 입격자나 유력 관직자를 배출하지 못하였으며 충주, 영주, 수원, 양주, 전주, 안동, 청주, 공주, 해주 등 전국 각지로 옮겨간 계열은 재경 관인화하면서 족세를 성장시켰다.
청풍 김씨는 조선 시기에 사마시 입격자의 수가 240명에 달하고 있으며, 문과 급제자도 101명에 달하는 유력 사족 집단이지만 제천과 청풍에 거주하면서 사마시에 입격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김충계와는 달리 일찍부터 서울에 거주하여 재경사족으로 성장한 김숙필(金淑弼)-김식(金湜)계는 명성왕후와 효의왕후를 배출하였지만 역시 재지적 성향은 약하다.
1964년 「제천군각읍면씨족별통계표」에 따르면 청풍 김씨가 청풍면에 99세대, 수산면에 52세대, 덕산면에 68세대 거주하였으며, 1998년 마을지에 따르면 제천시 금성면 사곡리, 수산면 도전리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최근에는 본관 성씨별 자료를 수집하지 않아 자세한 세대수는 알 수 없으며, 2000년 자료에 따르면 제천시에는 청풍 김씨가 538가구 1,598명이 있었다.
청풍 김씨 출신인 김식(金湜), 김권(金權), 김육(金堉) 등을 배향하기 위해 1639년 봉강서원(鳳崗書院)이 세워졌다. 봉강서원은 현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에 있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 154-5번지의 약 231.41㎡[70여 평] 자리에 조그마한 기와집이 있었으며, 그 뒤 산 쪽으로 커다란 밭이 조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건물의 성격에 대해 고직의 집이었다고 하였으므로, 뒤쪽의 수몰 후 조성된 마을 전체가 서원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조인 김대유의 구단비 및 신단비가 제천시 수산면 도전리에 있다. 단소에는 2기의 묘소가 있는데 봉분을 명확히 식별할 수 없어 동시에 관리하고 있다. 제천시 수산면 도전리에는 참례한 후손들의 숙식을 위한 청원각(淸源閣)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