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10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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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弘宇 |
이칭/별칭 | 덕용(德容),인재(忍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만호 |
출생 시기/일시 | 15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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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몰년 시기/일시 | 1636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78년 - 고사정 건립 |
묘소 | 고사정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삼천리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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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의병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임진왜란, 이괄의 난 때 의병 활동 |
조선 후기 화순 출신의 의병.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덕용(德容), 호는 인재(忍齋). 최충(崔冲)의 후손으로, 증조는 최윤범(崔尹範)이고, 할아버지는 증 영의정 최천부(崔天符)이다
최홍우(崔弘宇)[1562~1636]는 정개청(鄭介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작은아버지인 최경회를 따라 금산(錦山), 무주(茂朱), 개령(開寧)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1593년(선조 26) 진주성 전투 때 성이 함락되기 전에 최경회가 건내준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라는 그림과 언월도(偃月刀)를 가지고 성을 빠져 나왔다. 후에 아버지인 최경장(崔慶長)이 다시 의병을 일으킬 때 참여하여 통영(統營), 고성(固城)에서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은거하였다.
1607년(선조 40) 6월에는 정개청(鄭介淸)·이발(李潑)·이길(李洁)·유몽정(柳夢井)·조대중(曺大中) 등의 신원(伸冤)을 요청하는 상소(上疏)를 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1624년(인조 2)에 이괄의 난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집하여 태인(泰仁)까지 올라갔으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 초야에 묻혀 평생을 마쳤다.
인조 대에 행적을 기리면서 ‘남주 고사(南州高士)’라는 호를 내려주었다. 아들인 최후헌(崔後憲)이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678년(숙종 4)에 고사정(高士亭)을 세웠다. 현판은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썼으며 고사정 팔경시(八景詩)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