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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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望美亭 |
분야 |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 산 111-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태성 |
건립 시기/일시 | 164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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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83년 - 망미정 동복댐 수몰로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 산 111-1로 이전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8년 1월 7일![]() |
현 소재지 | 망미정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 산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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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누정 |
양식 | 단층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중재실 |
정면 칸수 | 3칸 |
측면 칸수 | 2칸 |
문화재 지정 번호 | 전라남도 화순군 향토 문화유산 제37호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에 있는 조선 후기 적송 정지준이 경영했던 누정.
현재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 산 111-1 앞산에 위치해 있다. 원래는 적벽을 마주하는 강의 둔덕에 있었으나 동복댐이 들어서면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지금의 자리로 이건한 것이다.
망미정(望美亭)은 정지준(丁之雋)[1592~1663]이 건립하였는데, 적벽 앞에서 적벽을 마주보고 있던 정자였기에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에 우의(寓意)하여 지었다고 전해진다. 정지준의 본관은 창원(昌原)으로, 호는 적송(赤松)이라 한다. 창랑(滄浪) 정암수(丁巖壽)[1534~?]의 손자이며, 우암 송시열의 제자이기도 하다. 인조 시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하윤구, 김종지, 정호민과 함께 창의하여 청주성에 이르렀는데, 이때 화의(和議)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귀향하여 이 누정을 짓고 은거하였다. 1983년 동복댐 수몰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단층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중재실을 갖춘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정이다.
망미정을 둘러싼 적벽은 기묘사화로 인해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가 능주로 유배될 때 동복으로 함께 유배된 신재 최산두(崔山斗)[1483~1536]가 이곳을 처음 발견하면서, 소식의 「적벽부」에서 그 이름을 따와 ‘적벽’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특히 최산두가 이름 한 적벽을 장항적벽 혹은 망미적벽이라고 한다. 2008년 1월 7일 화순군 향토 문화유산 제37호로 지정되었다.
이 누정에는 충과 효 교육의 산실로 삼을 만한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정지준의 할아버지인 창랑 선생은 손가락을 잘라 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아들과 함께 고경명을 따라 금산에서 전투에 임하기도 하였다. 이때 아들 정유성[정지준의 아버지]이 순국하였다고 전한다.
정지준의 아내인 마씨 부인의 일화도 유명하다. “장군이 나라의 부름을 받고 전장에 나가 의로움을 발하고 있는데 어찌 아녀자가 따뜻한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있겠는가.”라며 한겨울에도 멍석을 깔고 잠을 청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