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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부산, 쌍봉산 이야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1307
한자 雙阜山-雙鳳山-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원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80년 6월 9일 - 「쌍부산, 쌍봉산 이야기」 김선진으로부터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1년 6월 30일 - 「쌍부산, 쌍봉산 이야기」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수록
관련 지명 쌍봉산 -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지도보기
채록지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마귀
모티프 유형 지명유래담

[정의]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에 있는 쌍봉산에 관련한 지명유래담.

[개설]

쌍봉산은 해발 117m의 산으로 조암반도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정상에 오르면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장안면이 널리 펼쳐 보이고 멀리 서해가 조망된다. 쌍봉산에는 등산로와 근린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등산로 입구에는 쌍봉산의 유래를 설명하는 화성시의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정상에는 산신당 당집이 있다.

[채록/수집 상황]

1981년 6월 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쌍부산, 쌍봉산(雙阜山, 雙鳳山)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355~357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쌍부산, 쌍봉산(雙阜山, 雙鳳山) 이야기」는 1980년 6월 9일 화성시 우정읍 조암리에서 채록되었으며, 구연자는 김선진[남, 43세]이며 조사자는 성기열, 최명동, 김용범이다. 제목에 지명이 쌍부산(雙阜山)쌍봉산(雙鳳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화성시의 공식적인 표기는 쌍봉산(雙峰山)이다.

「쌍부산, 쌍봉산 이야기」는 여러 지면에 수록되어 있는데, 1989년 경희대학교 중앙박물관이 출간한 『화성군의 역사와 민속』의 255-256쪽과 1990년에 출간된 『화성군사』하권 901~902쪽에 관련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2005년에 출간된 『화성시사』는 458~459쪽에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와 『화성군사』하권 두 종류의 자료를 모두 정리 수록하였다. 이후 2006년에 출간된 『경기도 화성시 구비전승 및 민속자료 조사집』2-우정읍편에도 쌍봉산과 관련한 여러 편의 설화가 채록되었는데, 237·252~253·255·257·261쪽에 소개된 자료가 해당된다.

[내용]

아주 옛날 강원도 금강산이 산세를 갖추려고 전국의 명산을 끌어들였다. 이때 한 산이 금강산 중턱에 박혔는데 조화가 좋지 않아 금강산에서 내보내고자 하였다. 이 산의 마귀는 금강산에서 내보내진 후 산이 새로운 곳에서 괄시를 당하거나 또는 마땅찮은 곳에 자리 잡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마귀는 묘하게 생긴 산의 생김새가 부각되고 지역에서 가장 으뜸으로 서는 산으로 배치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산을 짊어지고 강원도 금강산에서 내려왔다. 산을 지고 오던 마귀는 지금의 쌍봉산 지역에 와서 산을 내려놓고 잠시 쉬어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자기보다 나은 산을 가져다 놓은 것을 본 옆 남산의 마귀가 안 되겠다 싶어 쌍봉산을 쫓아내려 하였다. 이에 남산의 마귀는 쌍봉산 쪽으로 바위를 집어 던졌는데 쌍봉산에 닿지 못하고 중간에 떨어졌다. 마을의 논 가운데에 그 바위가 있었는데 후에 사람들이 없애 버렸다. 돌이 날라오자 화가 난 쌍봉산의 마귀가 쌍봉산 주위에 있는 돌을 모두 남산으로 던져 보냈다. 이 때문에 남산 일대에는 돌이 흩어져 있고, 쌍봉산에는 돌이 없다. 그때 떨어진 바위 덩어리가 지금도 남산 중턱에 놓여 있다. 쌍봉산은 마귀가 산을 지고 오면서 산 가운데 잔등이 쑥 들어가고 양쪽 두 개의 봉우리가 높아져서 그 모양새 때문에 쌍봉산이라 부른다. 마치 지게에 쌀자루를 멜빵을 묶어서 질 때 새끼줄 멜빵을 걸어 동여맨 가운데 부분은 들어가고, 가마니 양쪽 끝 모퉁이가 불룩하게 솟아 나온 모습과 꼭 닮았다.

[모티프 분석]

쌍봉산 등산로 입구에는 쌍봉산의 유래를 설명하는 화성시의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쌍봉산 유래 게시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우리가 두 개로 되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고려 시대 쌍부현(雙阜縣)이 있는 곳의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전하고, 산의 생김새가 멀리서 보면 여인의 두 개의 젖가슴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전한다. 아주 오래 전에는 봉수(烽燧)가 있었다고 전하나 근거는 없으며 일제 강점기 3·1운동 당시 인근 마을 주민들이 이 산에 올라 만세를 불렀다. 또한 1794년(정조18)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쌍부산(雙阜山)이 나오는데 우정읍에 있으며 서남해를 바라볼 수 있다는 기록이 있어 쌍봉산의 본래 이름은 쌍부산(雙阜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예전에는 이 산에 잣나무가 많아 백산(栢山)이라고 불렀다고 전하기도 하며 이 산의 정상을 망월봉(望月峯)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옛날에 마귀[고]할미가 남쪽에서 한양으로 가는 도중 인심 좋은 삼귀, 곧 조암에 이르러 쉬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나쁜 일을 많이 하고 다녔기 때문에 하늘에서는 마귀할멈에게 서쪽 바닷가 ‘참담기’란 곳에 가서 배를 타고, 배가 닿는 곳에 가서 살라고 했다. 마귀할멈이 이를 거절하자 하늘에서는 뇌성벽력과 함께 그를 끌어 하늘로 데려갔는데, 이때 마귀할멈이 내려놓았던 두 개의 쌀자루가 변하여 쌍봉산이 되었다. 그 사이 골짜기는 마귀할멈이 쌀자루를 짊어졌던 멜빵자리가 변해 된 것이다. 후에 이 산에 장사들이 나서 마주 보이는 남산의 장사들하고 돌을 던지며 싸움을 하였다. 쌍봉산 장사가 힘이 세어 돌이란 돌은 다 남산으로 던져 쌍봉산에는 돌이 없고 남산에는 돌이 많게 되었다. 또한 쌍봉산을 바라보고 집을 짓고 살면 자손이 많고 먹을 복이 많으며 가이 다복하다 전하고 있다."

화성시 쌍봉산 유래 게시판은 『화성군사』하권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된 것이다. 그런데 이 자료에서는 마고의 신성을 부정하는 시각을 통해 산신 ‘마고할미’가 악귀나 잡신에 가까운 ‘마귀할멈’으로 와전되었고, 거인 산신 마고가 산을 옮기는 자연창조의 이야기가 상위 신에 의해 벌을 받고 처치를 당한 마귀할멈이 남긴 쌀자루가 산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변이 되었다. 이렇듯 시대적 흐름에 따라 마고를 규정하는 시각이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설화 또한 여러 유형으로 변이가 되었다. 벌을 받은 마고와 쌀자루가 그대로 돌이 되어 쌍봉산이 되었다고 하는 자료도 있고, 옥황상제에게 쌍봉산을 옮긴 것을 인정받고 산신령으로 명해지는 자료도 있다. 그럼에도 공통적으로 계속 유지되는 부분은 거인의 신체를 가진 마고가 거대한 등짐을 지고 이동하여 쌍봉산 지역에 도착했고 그 등짐이 쌍봉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쌍봉산 전설의 핵심은 ‘거인 마고를 통해 쌍봉산이 만들어졌다’는 거인창조 모티프라 할 수 있다. 또한 남산 쪽 보다 쌍봉산 쪽의 힘이 세다는 인식과 대결 구도로 인해 남산 쪽에는 돌이 많고 쌍봉산에는 돌이 없다는 지형 환경에 대한 유래담에서는 힘내기 모티프가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의 자료는 서사적 개연성과 완결성 측면에서 거인 산신인 마고에 의한 산 이동 부분과 지역의 두 산신 간 힘겨루기 내용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쌍봉산과 남산 마귀의 산신적 면모도 잘 서술되어 있다. 이에 이상의 내용 줄거리는 이를 선본 자료로 삼아 정리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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