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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889
한자 宗敎
영어공식명칭 Religion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상우

[정의]

경기도 화성 지역에서 초월적인 존재를 믿고 따르는 일체의 행위.

[전근대 시기별 화성의 종교]

1. 삼국 시대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에는 백제 관련 종교 유적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며, 유적의 형성 시기는 4-5세기의 것이 가장 많다. 특히 노리재골 유적에서는 대형 고상 건물, 우물, 대형 수혈, 배수로, 다수의 저장 구덩이 등이 발견되는데, 이는 백제의 유적일 가능성이 높다.

2. 고려 시대

고려는 불교 국가로 화성 지역에서 불교의 흔적은 고려초부터 확인된다. 고려 초기에는 통일 신라 시대 그 영향력이 컸던 선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고려 광종 때 혜거국사(惠居國師)가 화산의 갈양사(葛陽寺)로 하산했다는 내용의 비문이 일제 강점기 『조선불교총보』을 소개되었는데, 이를 통해 고려 초 선종 계열의 사찰이 화성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갈양사는 혜거 국사의 하산소로 지목되면서 중창되었으나, 혜거가 하산 후 1년 만에 입적하면서 그 성장은 멈추었으리라 생각된다. 갈양사가 언제 세워졌으며 어디에 위치하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수원의 옛 읍치 근처에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갈양사는 선종 9산에 속하지 않는 선종 사찰로서 그 존재 자체는 불교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고려 후기 화성의 주요 사찰로는 만의사(萬義寺)를 들 수 있다. 건립 시점을 알 수는 없으나 본래 동탄면 신리에 있었던 만의사는 1669년 중리로 옮기면서 사찰명을 만의사(萬儀寺)로 개칭하였다. 만의사는 이미 고려 시대부터 국가에 등재되어 관리되는 공인 사찰을 의미하는 '비보사찰'이었다. 만의사 대종으로 만들었다고 알려진 수원 팔달문 동종이 현재 남아 있다. 고려 후기 권문세족 가운데 하나였던 평양군 조인규 가문은 천태종 승려 4명을 배출하는 등 천태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이 가문은 화성의 만의사를 원당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조계종과 천태종이 함께 관리하던 만의사를 둘러싸고 우왕 때에는 분쟁이 발생하였고, 그 결과 만의사는 천태종으로 환속되었다. 고려말 조선초에 활동한 대선사 신조(神照)가 주지가 되면서 만의사는 다시 한 번 천태종의 핵심 사찰로 성장하게 되었다.

3. 조선 시대

조선은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세워졌으며, 건국 직후부터 유교적 이념을 뿌리내리도록 하기 위해 전국의 군현에 향교 건립을 추진하였다. 화성에는 현재 남양향교가 남아있는데, 그 건립 시점은 정확치 않으나 강령도호부의 계수관이 된 고려 충렬왕 때 향교가 세워졌으리라 짐작된다. 향교의 핵심적 종교적 기능은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한국의 선현들의 제사를 지내는 데 있었으며, 남양향교는 조선 시대 내내 화성의 유교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남양향교는 여러 차례 중수되었는데, 1553년 도호부사 송지한이 대성전을 중수한 이래, 1643년, 1667년, 1679년에도 중수가 진행되었으며, 1871년부터 1873년 사이에는 역골에 있던 대성전을 이건하였다. 최근에는 1989년에 중건이 이루어졌다. 현재의 남양향교는 조선 시대 향교와 달리 제사 대상을 축소하여 중국의 공자 및 5성인과 송나라의 2현인, 그리고 한국의 18명의 유학자만을 제사하고 있다.

조선에서 불교의 위세가 약해졌으나, 여전히 민간에서는 물론 국가적으로도 불교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화성의 대표적인 사찰 중 하나인 용주사(龍珠寺)가 조선 후기인 1789년에 세워지기도 했다. 용주사정조가 생부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화성으로 이전하고 현륭원으로 개칭하면서 조포사(造泡寺)로 세워진 절이다. 조포사는 제사에 쓰는 두부를 제공하는 등 능원묘의 관리를 돕는 사찰이었으나, 용주사는 단순 제수를 마련하는 역할에서 더 나아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비는 원당의 역할을 맡았고, 국가의 후원 속에서 불교계를 대표하는 사찰로 부상하였다. 또 용주사는 창건시부터 전국 승려들을 규찰하는 오규정소(五糾正所)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어 전국 승군의 통솔을 맡았고, 용주사의 승군들은 장용영 외영에 소속되어 화성 지역의 수비를 담당하는 등 국가적으로 높은 위상을 확보하였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도 전래되어 서학으로 불리며 교세를 확대하였다. 화성에는 18세기 후반에 이미 천주교가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교 문화와의 충돌로 인해 18세기 후반부터는 국가적인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고, 19세기 이후에는 신유박해, 병인박해 등으로 알려진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이 진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성의 느지지[지금의 양감면 요당리]의 장주기(張周基) 일가족이 천주교 신앙을 가지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1820년대에는 화성에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성장한 교우촌을 기반으로 봉담면 갓등이양감면 용소리의 교우촌은 공소로 지정되었다. 전국적인 천주교 박해가 벌어진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화성에서도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는데, 그들이 처형된 장소가 지금의 화성 남양성모성지이다. 1880년대부터는 다시 천주교인이 증가하기 시작하여, 1888-1889년 앙드레(Andre) 신부의 주도로 갓등이왕림성당이 완성되었다. 이후 화성의 천주교세는 계속 성장하여 미리내와 하우현에도 본당에 세우졌으며, 1910년에는 신자수가 왕림 1,301명, 미리내 2,378명, 하우현 2,396명에 달했다.

[근현대 화성의 교육 및 민족운동과 종교]

근대 민족 운동과 관련된 주요 종교들의 동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천주교

천주교의 교세는 근대에도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1920-1921년에는 왕림본당의 신자가 2,533명으로 증가하였고, 6·25전쟁을 겪은 후임에도 1953년에는 그 수가 3,300명에 달했다. 1937년까지 화성에는 지청재, 병점, 안석리, 활초리, 개묵리, 고모루, 바닷돌, 원목, 거먹골, 석포리, 북석리, 장지미, 안산동, 압실 등지에 공소가 세워졌다. 화성의 천주교는 1919년 3.1만세운동에 동참하였으며 이후에도 왕림성당을 중심으로 꾸준히 교육 사업을 추진하였다. 1893년에는 천주교회가 중심이 되어 삼덕학교(三德學校)가 세워졌으며, 1914년에는 신명의숙(新明義塾)으로 개칭하여 운영되었으며, 1927년에는 수녀가 파견되어 주재하면서 지역 내 초등교육에 기여하였다. 신명의숙은 1933년 왕림학원(旺林學院), 1938년 왕림강습소로 이름을 바꾸며 운영되다가 해방후 1946년 세워진 광성국민학교 설립의 모태가 되었다.

2. 개신교

개항기 한국에 소개된 개신교는 죽산군수를 지낸 향갈동의 김홍수(金弘秀), 인천 내리교회의 남양 지역 선교를 통해 화성 지역에 전파되었다. 1900년을 전후하여 세워진 남양교회와 송산면 마산포 포막동의 교회가 최초로 세워진 화성의 교회로 보인다. 남양교회의 지도자 홍승하(洪承河)가 남양읍, 양철이, 포막, 매화동, 용두, 영흥, 선감 등지에 교회를 세우는 등 1903년까지 8~9개의 교회가 생겨났다. 그 외에도 사강교회, 수촌교회, 신남교회 등이 세워졌다. 그와 동시에 기독교 계열 사립학교들이 세워졌고 이를 기반으로 근대 의식과 민족운동이 심화되면서, 남양교회의 동석기(董錫琪) 목사가 서울에서 3.1운동에 참여하여 수감되기도 하였다. 개신교는 3.1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그 결과 일제의 탄압을 받게 되었다. 3.1운동과 관련하여 화성의 교회의 박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례는 제암리 학살 사건이다. 향남팔탄면의 3.1운동을 주도한 개신교에 대한 보복으로 1919년 3월 15일 일본군경은 마을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몰아넣은 채 불을 지르고 사격하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화성 우정에서 벌어진 3.1운동을 주도한 수촌교회에 대한 보복으로 수촌교회 역시 불에 타고 김교철 전도사는 구속되었다. 이후 화성 지역의 개신교 교세는 약화되었으나, 교육활동과 연합운동, 민족운동 등을 통해 신앙을 지켰다.

3. 천도교

천도교는 1860년 최제우에 의해 개창된 동학에서 출발하였다. 급격히 교세를 확장시킨 동학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반외세 운동의 선봉에 서게 되었고, 정부와 일본군의 탄압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1900년대 초부터는 다시 교단을 정비하고 근대 문명을 수용하는 개화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1905년에는 지도자인 손병희가 교단을 동학에서 천도교로 교명을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화성 지역에는 1906년 수원에 그리고 1910년 경에 남양에 지방 교구가 조직되었다. 천도교는 3.1운동의 확산에 큰 역할을 하였는데, 이후 화성의 천도교는 교세를 확장하여 1920년대 초에는 화성의 남양교구가 경기도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교구 가운데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천도교는 장안면 기린동과 독정리, 우정면 화산리, 영흥도, 동탄면 방교리 등지에서 포교를 진행하였다. 1930년대 초반 남양교구가 수원교구와 통합되었다. 천도교는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중앙에는 사범종학강습소, 지방 교구에는 교리강습소를 설치하여 천도교 교리 뿐 아니라 사회 계몽 교육에도 노력하였다.

천도교는 3·1운동을 주도한 세력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천도교 희생자들은 주로 제암리고주리에서 발생한 학살사건에서 나왔다. 이후로도 천도교는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신간회 수원지회 창립에 천도교청년동맹 수원동맹 및 남양동맹이 참여하였으며, 신간회의 화성 조직도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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