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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65
한자 朴世薰
이칭/별칭 훈지(勳之),송촌(松村)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윤성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88년연표보기 - 박세훈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04년 - 박세훈 아버지의 상을 당함
활동 시기/일시 1508년 - 박세훈 사마시 합격
활동 시기/일시 1519년 - 박세훈 조광조가 현량과에 추천
활동 시기/일시 1522년 - 박세훈 어머니의 상을 당함
몰년 시기/일시 1553년연표보기 - 박세훈 사망
묘소|단소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제부로 860-36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안곡서원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제부로 860-36 지도보기
성격 효자
성별
본관 상주(尙州)

[정의]

조선 전기 경기도 화성시 안곡에 거주한 학자이자 효자.

[가계]

본관은 상주(尙州). 자는 훈지(勳之), 호는 송촌(松村). 박안의(朴安義)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박미창(朴美昌)이고, 아버지는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박사화(朴士華)이며, 어머니는 신복담(辛福聃)의 딸이다. 1514년(중종 9)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박세희(朴世熹)의 형이다. 아들이 7인이 있어서 자손이 번성하였다.

[활동 사항]

박세훈(朴世薰)[1488~1553]은 1488년(성종 19)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주동의 효아 (鑄洞孝兒)’ 라고 불렸다. 1504년(연산군 10) 17세 여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상례(喪禮)에 정성을 다하였고, 남양(南陽) 묘소 아래에서 3년 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이 때 동생 박세희(朴世熹)는 14세, 막내 박세후(朴世煦)는 11세이었는데, 두 아우와 함께 낮에는 여막에 마주앉고 밤에는 함께 누워 성현의 글과 효제·충신의 도리를 가르쳤고, 상기를 마친 뒤에 어머니 및 두 아우와 함께 본가로 돌아왔다.

20세가 되어 학문이 높았으나, 과거에 응시하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권유로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이것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였고, 이 뒤로는 더 이상 응시하지 않고 스스로 지조를 지키며 성현의 글 읽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동생인 박세희가 조광조(趙光祖)나 김정(金淨)과 사귀는 것을 칭찬하였으나, 번번이 경계하였다. 1519년(중종 14) 재능이 많고 학문과 덕행이 있는 것으로 조광조 등이 현량과에 천거하였다. 1519년(중종 19) 추천된 120명의 후보자에 포함되었지만,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 등이 화를 당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관직의 뜻을 버렸다.

향촌에서 생활하면서 향촌 자제들의 교육에 전념하고 인근의 수원·남양·용인 등지의 사림과 교유하면서 학자로 일생을 보내었다. 1522년(중종 17)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동생 박세후와 함께 남양에 있는 묘소를 지키며 상례에 극진하였다. 상기를 마친 뒤에 학덕과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553년(명종 8) 10월 66세로 사망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풍수설에 따르지 않고, 아버지의 묘소 옆에 장사하였다. 나중에 동생인 박세희가 배소인 강계에서 사망하자, 반장(返葬)하여 박세훈의 묘 곁에 장사지내었다.

[학문과 저술]

박세훈은 『효경』이나 『소학』 등의 경전 공부에 치중하였다. 집에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서 세한(歲寒)의 깊은 취미를 붙이고, 스스로 '송촌(松村)'이라는 호를 붙인 것도 『소학』을 중시한 성향을 보여준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안곡서원 부근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66년(현종 7) 안곡서원이 건립되어 동생 박세희가 배향되었다가, 1668년 박세훈(朴世薰)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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