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2009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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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臺庵 |
영어공식명칭 | Geumdaeam |
이칭/별칭 | 금대사,금대선원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천왕봉로 1035-528[가흥리 17-3]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배상현 |
건립 시기/일시 | 65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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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중창 시기/일시 | 통일신라말 - 금대암 중창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430년 - 행호가 안국사와 함께 중창하여 금대사라 칭함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960년 -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중건 |
중수|중창 시기/일시 | 1985년![]() |
최초 건립지 | 금대암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천왕봉로 1035-528[가흥리 17-3] |
현 소재지 | 금대암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천왕봉로 1035-528[가흥리 17-3]![]() |
성격 | 사찰 |
창건자 | 행우 |
전화 | 055-962-5500 |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 소속 사찰.
금대암(金臺庵)은 656년(신라 무열왕 3) 행우(行宇)가 창건하였다. 이후 도선(道詵)[827~898]이 나한전을 지어 중창한 뒤 나한도량으로 명성을 떨쳤다. 고려 때는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의 제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1178~1234]이 금대암에서 주야로 게송(偈頌)[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을 읊으며 정진하였다. 1430년(세종 12)에 천태종 판사도대선사(判事都大禪師) 행호(行乎)가 근처 안국사(安國寺)와 함께 중창하여 금대사(金臺寺)라고 하였다. 1489년(성종 20)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남긴 『속두류록(續頭流錄)』에는 당시 금대암에 20여 명의 승려가 경을 외우며 수행하였다고 전한다.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1520~1604]도 금대암에서 수도 정진한 것으로 전하여진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전란의 피해를 보았다. 그후 중창되었다가 6·25전쟁으로 다시 소실된 것을 금대암복구기성회가 조직되어 1960년에 중건하였다. 1985년에 법당을 새로 지으면서 옛 법당을 해체하여 현재 자리로 옮기고 금대선원(金臺禪院)으로 불렀다.
매월 음력 초하루에 법회가 열린다. 신도 수는 약 300명이며, 원거리 신도 모임인 관음회 회원 수가 약 50명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마천면 가흥리 17번지 산 위의 암반에 자리 잡고 있다. 1950년 전쟁의 병화(兵火)로 소실된 것을 1960년에 중건하였다. 1985년에 현재의 법당을 새로 지으면서 옛 법당을 해체 복원하여 자리를 옮기고 사명을 금대선원(金臺禪院)으로 바꾸었다. 1999년에 나한전을 새로 지었으며, 2002년 태풍 루사 때 요사채가 파손되어 이듬해 금대선원 옆에 새로 지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8호인 함양 금대암 동종,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인 함양 금대사 삼층석탑, 문화재자료 제269호인 함양 금대암 신중도, 경상남도 기념물 제212호인 함양 금대암 전나무 등이 있다. 함양 금대암 동종[높이 59㎝, 지름 43㎝, 둘레 138㎝]은 조선 중기 전형의 동종으로, 1734년(영조 10)에 하동 쌍계사에서 제작된 것이다. 상부의 용두가 정교하다. 삼층석탑은 행우가 금대사를 짓고 암반 위에 세운 것으로 전하지만 고려 말에서 조선 초 작품으로 추정된다. 함양 금대암 신중도는 크기 100×105㎝의 1785년(정조 9)에 제작된 것으로, 화기(畵記)에는 서우와 예우 등이 제작에 참여하였다고 전한다. 한편 금대암 입구에 있는 전나무는 높이가 40m에 이르며, 우리나라에서 수령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