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6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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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彝 |
영어공식명칭 | Jo 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광철 |
고려 후기 함안 출신의 문신.
조이(趙彛)는 일찍이 중이 되었으나 환속하여 문과에 급제하였다. 원나라에 가서 황제가 거처하는 곳을 출입하면서 일본을 회유하는 데에 고려를 앞세울 것을 종용하여 고려의 처지를 어렵게 하였다.
본관은 함안(咸安). 초명은 인여(藺如). 조이는 한때 승려로 활동하다 환속한 다음 과거 공부를 해서 진사에 급제하였다. 뒤에 나라를 배반하고 원나라로 들어가 수재(秀才)라 불렸으며 여러 나라 말을 잘 해독하였다. 황제의 처소에 출입하면서, 고려가 일본과 우호 관계를 맺고 친하게 지낸다고 참소하기도 하였다. 조이가 참소한 내용은 1266(원종 7) 11월 몽고에서 파견된 흑적(黑的)과 은홍(殷弘) 등이 가지고 온 조서에서 드러났는데 그 조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방금 그대 나라 사람인 조이가 와서, 일본은 고려의 이웃 나라로 그 나라의 제도와 정치가 제법 훌륭하며 옛날 한나라, 당나라 이후로 중국에 때로 사신을 보냈다고 보고했다. 그 말을 듣고 지금 흑적 등을 일본으로 보내 외교 관계를 맺으려고 하니 경은 우리 사신을 그 땅까지 인도해 일본인들로 하여금 우리 조정을 우러러 받들 수 있게 깨우쳐 줄지어다. 경은 마땅히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니, 풍랑이 심하다는 핑계로 거절하지 말 것이며 과거 일본과 외교 관계가 없었다는 말로 우리를 설득시키려 하지 마라. 저들이 짐의 분부를 따르지 않고 사신을 거부할까 우려해 특별히 당부하는 것으로, 경의 충성이 이 일로 증명되리니 각별히 노력하라.”[『고려사(高麗史)』 권26, 세가, 원종 7년 25일 계축]
이 조서의 내용대로 고려는 3일 뒤 추밀원부사 송군비(宋君斐)와 시어사(侍御史) 김찬(金贊) 등에게 흑적 등과 함께 일본으로 가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봄 정월 송군비와 김찬은 몽고 사신과 함께 거제도 송변포(松邊浦)에 도착한 뒤 풍파가 험난한 것을 보고는 돌아왔다. 왕은 송군비에게 다시 흑적을 수행하여 몽고로 가서 일본에 가지 못한 사유를 보고해야 했다. 조이는 이후에도 고려에 대해 중상모략을 일삼았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