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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양방죽 풍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348
한자 景陽防-風水
이칭/별칭 경호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경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전구간 경양방죽 -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일대지도보기
성격 풍수

[정의]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에 있던 조선시대 저수지 경양방죽에 대한 풍수 해석.

[개설]

경양방죽은 1960년대까지 현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계림1동]에 있던 저수지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부가 매립되었고, 1968년 태봉산을 헐어 경양방죽을 완전 매립하였다.

[명칭 유래]

저수지 북동편 우산동에 있던 조선시대 경양역(景陽驛)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자연환경]

1990년 간행된 『광주의 전설』 중 경양호에 관한 내용을 요약하면 “광주는 예로부터 한해(旱害)가 자주 일어났고, 이를 위하여 대규모 방죽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 즉 광주는 가뭄과 흉년이 잦다. 광주가 불기운이 성한 고을인 까닭이다. 광주에 화재가 일어나도 그 기운을 잡을 만한 큰 연못이 없었다. 경양방죽을 축조하면 수화(水火) 조화를 이루어 고을을 보존할 것이다.”라고 나와 있다.

[현황]

『조선의 임수』에 “경양제방에 팽나무와 왕버들로 들어차 있었으며, 큰 나무인 경우 그 둘레가 최대 40㎝에 이르렀다. 숲은 길이 1㎞ 폭 10m 방죽길 양쪽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양역에 이르는 역로와 담양 가도를 이용한 둑길의 가로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방죽 아래 이른바 ‘방죽밑들’의 농경지와 민가를 겨울 폭풍으로부터 보호하는 구실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60년 말 경양호는 완전 매립되고, 광주시청 터와 주택가로 변하였다. 최근 회색 경관으로 탈바꿈한 시가지에 대하여 근처 태봉산의 사라짐과 함께 시민사회의 안타까운 의견이 많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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